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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월수입 24만원...이 돈으로 살아지냐고?2005-11-04
작성자상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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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12년 간 운영하던 가게를 내놓았습니다

12개 대여. 오늘의 실적이다. 편당 대여료가 500~1500원이니 대략 1만원정도 수입을 올린 셈이다. 하루매출을 내기에도 어이없는, 이런 상황이 반복된 지는 꽤 오래됐다. 한달에 60만원 정도는 되던 수입이 어느새 반으로 줄더니 지난달에는 24만원으로까지 감소했다.

눈치 챘겠지만 나는 비디오테이프 대여점 주인이다. 사실 비디오테이프 대여점이 사양길에 들어선 지는 꽤 됐다.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어렵지는 않았는데, 이제는 경기가 어렵다는 말이 절절하게 와 닿는다. 지난 29일 낮에는 월세와 테이프값을 계산하고 나니 수중에 단돈 1만원만 달랑 남았을 정도니 말이다.

하면 할수록 적자가 나는 이 정든 일터에서 나는 최근 머리가 터지도록 고민했다. 그리고 결국 결심했다. 12년 동안 정들었던 이 가게를 접기로.

세상을 다 품었던 5평짜리 비디오가게

나와 이 비디오가게와의 인연은 남편과의 만남에서 비롯됐다. 내가 남편과 결혼하기 전인 1993년 11월, 비디오 촬영을 좋아하던 그는 언양에 5평짜리 비디오가게를 차렸다. 당시 그는 직장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낮에는 형수가, 밤에는 그가 가게를 보는 식이었다.

이듬해, 우리 부부는 결혼식을 올렸고 비디오가게 운영은 순전히 내 몫이 됐다. 결혼 전 5년동안 직장생활을 했던 나는 비디오가게를 운영하는 게 마냥 즐거웠다. 시간에 쫓기지도 않고, 자유롭게 일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했다.

처음 몇 달 간은 컴퓨터가 없어서 공책에 신규회원 이름과 대여횟수를 적으면서 꾸려나갔다.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웃음부터 나오는데, 가내수공업이 따로 없을 정도였다. 손님이 테이프를 가져오면 공책에서 대여한 날을 찾아 볼펜으로 줄을 찍찍 긋곤 했으니까. 그래도 이 가게 하나만 성실하게 꾸려 가면 세상을 다 얻을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에 찬 날들이었다.

물론, 항상 가게를 지켜야 했기 때문에 가족끼리의 나들이나 부부동반 집안행사에 참석하는 건 꿈도 못 꿀 일이었지만, 상사 비위 맞추랴, 출퇴근 시간 엄수하랴 등등으로 시달림 받던 직장생활에 비하면 그 정도 수고쯤이야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래도 명색이 '싸장님' 아니신가!

아이가 태어나면서, 이 몸은 더 바빠졌다. 아이 보랴, 손님 맞으랴 몸이 두개라도 모자랄 정도였다. 그래도 핏덩이를 남의 손에 맡기지 않고 엄마인 내 살을 맞대며 키울 수 있다는 생각에 '난 복 받은 거야'라고 자위할 수 있었다.

그러길 3년, 어느 정도 가게도 자리를 잡아갔다. 남편은 여전히 직장에 다녔지만 주말에는 웨딩촬영을 하면서 짭짤한 수입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치열한 경쟁 거쳐 '월 300개 대여' 고지에 오르다

주변에 저가 비디오대여점이 우후죽순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우리 가게 건너편에 40평짜리 대형 비디오가게가 '떡'하니 들어섰다. 5평 대 40평이라니! 더군다나 그 비디오가게는 그 건물 주인이 직접 운영하는 곳이었다. 그때의 막막함이란!

한달 80만원 정도 되던 수입은 순식간에 절반수준인 40만원으로 떨어졌다. '가게 문을 닫을까?'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상하게도 내 안에서 오기가 생겨났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한번 부딪혀 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열린다고 했던가. 다행히 우리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때마침 우리 가게 옆에 빈 점포가 난 것이다. 저축했던 돈을 다 털어 그 돈으로 옆 점포를 대여하고, 가게를 확장했다. 5평짜리 공간은 20평짜리 공간으로 거듭났다. 8분의 1크기로 싸우는 것 보다야 2분의 1 크기로 싸우는 게 더 낫지 않겠는가.

하지만 가게 확장 첫 달, 내 가계부는 '적자 160만원'을 기록했다. 밤 늦게까지 가게 문 열면서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지만 인건비는 고사하고 신규테이프 결제할 돈도 없었다. 결국 남편 월급으로 적자를 메웠다.

속상해서 눈물이 나오려고 했지만 다시 한번 이를 '꽉' 깨물었다. '어떻게 첫 술에 배 부르겠냐'는 주위 사람들의 위로에 힘을 얻어 각종 아이템으로 승부를 걸었다. 다행히 가게 상황은 점점 좋아졌다. 160만원이나 났던 적자폭은 70만원에서 40만원으로, 다시 10만원으로 줄더니 드디어 흑자로 돌아섰다.

그때부터 가게는 잘 풀리기 시작했다. 잘 나갈 때는 하루에 300개씩 나가기도 했다. 보통 때도 100~150개정도씩 나갔다. 언젠가는 신프로 들여놓는 값만으로 300~400만원을 지불하기도 했으니 운수대통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생 끝에 낙? 지성이면 감천?

좋은 시절은 어찌 그리 짧던지

그러나 좋은 시절은 오래가지 못했다. 길 건너편 40여 평짜리 비디오 가게가 3년 만에 문을 닫은 것이다. 그것이 신호탄이었다. 인터넷 보급이 확산되면서 비디오테이프 대여점은 사양산업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비디오보다는 컴퓨터 게임을 즐기기 시작했고, 무료로 영화를 다운받는 네티즌들이 많아지다 보니 비디오 마니아의 수도 줄어들었다.

몇 년 새 내가 아는 비디오테이프 대여점 중 7군데가 문을 닫았다. 이 동네 터줏대감인 우리 가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제 월평균 24만원이 내 수입이다. 흑자는커녕 생활비로도 쓸 돈도 모자라게 된 것이다.

결국 우리 가족의 젊은 시절 풍상을 함께 헤쳐 온 이 가게를 내놓고 난 뒤 결심했다. 앞으로는 즐겨먹는 라면도 안 사기로. 나의 급급한 사정을 알았는지 아이는 하루 300원 받던 용돈을 안 받겠다고 한다. 기특하게도(니 용돈은 그냥 계속 주마).

우리 아이는 이 가게에서 태어나고 자라났다. 방이 딸려있는 가게인지라 가게가 나가면 이사도 가야 한다. 아이도 정 들었던 집을 떠나는 게 못내 아쉬웠던지 "엄마, 낡은 집이라도 나는 이 집이 좋아요. 이사 안가고 싶은데…"라며 속내를 드러낸다.

막상 가게를 내놓긴 했지만 앞으로 뭘 해서 먹고 살지 솔직히 막막하다. 두 달 전부터 일자리를 알아보려고 벼룩시장을 뒤졌지만, 할줄 아는 거라곤 비디오대여점 운영밖에 없는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은 없었다. 내 자신이 요즘처럼 한심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게다가 남편도 8년 전부터 회사에 다니지 않는 상태인지라 두려움도 크다. 목 디스크 수술을 받고 아직 건강 회복이 덜 된 남편은 그래도 가게가 나가면 무얼 할지 이것저것 알아보느라 정신이 없다.

나만이 아니라 주변 자영업자들에게도 요즘은 살기 쉬운 상황이 아닌 듯하다. 어디를 보든 "IMF때도 이렇게 어렵지는 않았다"는 한탄소리가 들린다.

어떻게 살아온 난데... 이제 다시 시작이다

막막해지니 옛 시절이 떠오른다. 돌아보니 나에겐 쉬웠던 시절은 없었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학창시절, 당시 우리 집은 보증금 50만원에 월세 3만원 하는 연탄보일러 집이었다. 툭하면 연탄불이 꺼지는 냉방에서 우리 6식구는 잠들기 전에 늘 드라이어로 이불 속을 데웠었다. 쌀도 이웃에 빌리거나 한 되씩 사서 먹었다.

하지만 다시 오기가 생긴다. 내가 누군가. 추운 겨울에도 변변한 점퍼 하나 없이 버스비 아끼려고 한 시간 거리를 한파 속에서 걸어 다녀야 했던 그 시절도 헤쳐 온 나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던 나와 우리 가족, 우리 부모님이 여전히 '발 법이의 고달픔'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게 못내 억울하지만 그 옛날에 비하면 그래도 최소한 밥은 굶지 않고, 추위 막아줄 따뜻한 점퍼라도 생겼지 않느냐고 나를 위로하며 다그친다.

무엇보다 내게 더 큰 힘을 주는 것은 바로 나와 남편, 아이가 만들어 놓은 가족이라는 울타리다. 힘든 일이 생기면 남편 얼굴 한 번 보고, 더 힘든 일이 생기면 아이 얼굴 한 번 더 보면서 두려운 세상 앞에 다시 한번 도전장을 던진다.

출처 : OhmyNews 박미경(평등세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