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급과 수요의 가장 기본적인 경제 논리마저 파고들 틈이 없었던 변호사 업계가 술렁이고 있다. 블루오션을 찾지 못하면 해마다 500여명 이상 배출되는 신진변호사들의 살길이 막막하다.
변호사의 수적 증가는 문민정부 시절 세계화추진위원회가 설립되면서 법조계의 국제화를 위해 지속적으로 추진되어 왔다. 이에 따라 1980년대 후반 300명이던 정원이 1990년대 중반 500명으로 늘어났고 현재는 1000명에 달한다. 그러나 1000명 중 판·검사로 진출할 200명 남짓 인력을 제외한 나머지는 변호사로서 스스로가 살길을 찾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다. 거기다 2009년 이후부터 로스쿨 제도 시행으로 2000~3000 명의 변호사가 해마다 새로 양성될 테고 법률시장 개방 가시화로 해외 법조 인력과도 밥그릇 싸움을 해야 할 마당이다.
“사법연수원 수료하기 전에 사건을 5개 이상 가지고 나오지 못하면 변호사 사무실 내봐야 1년 버티기 힘들다고들 해요. 사법시험 준비하느라고 나이는 어느새 사십 대를 바라보니 일반 기업에 취직하기 힘들고 성적이 안 되니 판검사는 넘볼 수도 없고….”
연수원생인 이모(38)씨는 사법시험 2차 에 합격했을 때만 해도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그러나 사법시험 패스가 인생역전이던 시대가 지났음을 그는 요즘 실감한다. 변호사 돼서 사무실 임대료도 못낸다는 선배들의 말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제가 합격하고 1년 있다가 연수원에 들어갔어요. 고시원 생활 하면서 학원과 인맥이 닿아서 학원 강사로 일을 했는데 사법시험 합격하니까 강사 인기가 치솟았죠. 동병상련의 입장인 고시원생들 가르친다는 보람도 있고 수입도 남부럽지 않았어요. 연봉으로 따지면 3억원 정도 됐으니까요.”
강사로서 입지를 다진 다음 연수원을 수료하면 그야말로 인생 탄탄대로였다. 책도 내고 동영상 강의까지 할 경우 수입은 일반 강사와 비교도 안될 만큼 높아진다. 그러나 로스쿨 제도 도입이 발표된 뒤 이씨는 숨이 탁 막혔다. 5만명 가량의 고시생이 사라지면 강사도 무용지물이 된다.
“연수원은 지금 시험지옥이에요. 보통 1년차 때 시험을 보면 미래의 명암이 갈려요. 1000명 가까이 되는 연수원 생 중 200등까지는 판검사로 임명이 될 테고 500등 이내에 들면 대형로펌이나 정부기관, 기업의 사내변호사 등으로 진출할 수 있거든요. 나머지 500명은 어떻게든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중소로펌으로 가거나 자기 사무실을 내는 방법 말고는 딱히 다른 대안이 없는 형편이죠. 고시공부하던 때보다 더 치열해요.”
성적순으로 갈 길이 정해지니 연수원생들은 시험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이씨는 현재 700등 내외. 변호사 개업을 하는 방법 외에는 달리 도리가 없다. 로펌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두드려져 김앤장, 광장, 태평양, 화우 등 총 10개의 국내 정상급 로펌이 아니면 변호사 생활 보장에 큰 기대를 걸기 힘들다. 10위권 이내의 로펌에는 매년 50명 정도의 수료생이 진출하는 실정이니 취업의 기회는 사실상 바늘구멍보다 좁다.
성적이 안 되면 차선책을 택해야 한다. 그 중 미래에 대한 안전망이 확실한 정부부처나 공공기관, 기업 사내변호사 취업은 인기가 높다. 국선전담변호사 모집에 부장판사, 부장검사를 지낸 이들이 포함될 정도다. 하지만 대우는 예전과 다르다. 대기업에 취직하는 사내변호사의 경우 1980년대만 해도 이사급 임원으로 발탁이 됐고 1990년대는 부장급은 달아야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지금은 변호사 채용시 과장급 직함을 주는 것이 상례다. 그것도 경쟁이 치열해 해마다 경쟁률은 수십 대 일에 달한다. 2005년 연수원생 채용 원서접수 결과를 보면 삼보컴퓨터의 경우 87 대 1을 기록, 가장 높은 경쟁률을 보였고 한화그룹 76 대 1, 미래에셋자산운용이 20 대 1 에 달했다. 같은 해 노동단체 상근변호사 경쟁률도 10 대 1에 이르렀다. 업무량은 일반 변호사보다 많은데 보수는 3분의 2 수준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부부처에서 활동하는 것도 지금은 행정고시나 외무고시와 맞춰 5급 공무원 대우를 받는다. 예전에 변호사가 정부부처에 들어간다 하면 3급 대우를 받았던 것을 기억해볼 때 그 명암이 확연히 드러난다.
물론 가장 고민이 많은 그룹은 수임변호사 시장이다. 36기 연수원생인 박모(39)씨는 성적은 물론 연령제한에도 걸린다. 판사는 만 39세, 검사는 만 35세까지 연령 제한이 있고 기업이나 로펌들은 보통 만 32~36세까지가 연령제한 폭이다. 박씨는 “예전에는 나이가 많은 연수원생에게는 나중에 변호사로 개업을 하면 사건을 밀어주었는데 요즘은 그런 풍토도 없어졌다”고 털어놓는다. 연수원 교육 제도는 현재 16개반으로 구성 1개 반이 3개 조로 나뉘어 있고 각 조에 자치회장이라는 조장이 있다. 조장은 각 조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 하는 것이 관행으로 각종 행사를 기획하고 조원들의 단합과 교수 보좌 등의 일을 한다. 각 조를 위해 시간을 희생하는 대신 교수나 연수생들이 변호사로서의 자리매김을 도와왔으나 요즘은 조장이라고 해서 특별한 혜택을 받을 수 없다. 공급이 넘쳐나니 다들 수임 사건이 모자라는 형편에 누구를 탓할 일도 아니다. 연수원을 수료 한 뒤 희망하는 초봉도 점차 낮아지는 수준이다. 보통 10대 로펌의 신임변호사 연봉이 1억원 안팎, 변호사 개업을 해서 좋은 성과를 낼 경우에도 월 1000만원 이상 수익을 낸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연수원 수료 후 5000만~7000만원의 연봉을 평균으로 잡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사실상 최저 수입과 연봉은 5000만원이다. 연수생 김모씨는 연수원에서 불문율처럼 떠도는 말을 전해준다. “서울에 있는 명문대를 나오고 사업하는 친인척이나 개인적 인맥이 있고 친화력이 있어 영업을 할 수 있고 남자일 것. 이 네 가지 조건이 맞아야 변호사 사무실을 냈을 때 월 1000만원 이상 수익을 낼 수 있다고 해요. 사건 수임 영업 관행이 골프나 술자리에서 이뤄지고 주변에 사업하는 사람이 있어야 큰 사건을 많이 가져올 수 있거든요.”
연수원 등록을 연기하는 합격생도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올해 3월 사법연수원 37기 중 연수원 등록을 연기한 합격생은 합격자 1001명의 10%를 넘는 106명이었다. 사시 합격자가 1000명 이상으로 늘어난 2002년(33기) 33명부터 2003년(34기) 59명, 2004년(35기) 63명, 2005년(36기) 83명으로 매년 미등록자가 증가하고 있는 상황이다. 47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이모(32)씨는 연수원 대신 대학원에 진학했다. “연수원 다니면서 석사 과정 공부하는 이들이 주변에 많이 있어요. 굳이 판검사를 목표로 삼지 않는다면 연수원에 대한 미련을 버리는 게 현명한 선택이라 믿어요. 요즘 결혼시장에서도 연수원생 성적까지 알아보고 만남을 주선한다고 하잖아요. 법적 지식을 토대로 제 나름대로의 분야를 개척할 생각입니다.”
연수원생들은 현재의 변호사 사회의 어려운 사정이 실정과 맞지 않는 연수원 교육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음을 지적한다. 한 연수원생은 “현 연수원 교육은 공소장이나 불기소장 작성 같은 법관과 검사 양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 변호사 양성 교육이 절실하다”고 털어놓는다. 실무 경험을 쌓는 연수시보도 법관은 6개월, 검찰실무는 4개월인 데 반해 변호사 시보는 2개월에 불과하다. H 로펌에 근무하는 이모 변호사는 성적에 미래가 달려있는 상황 때문에 연수원 시험 족집게 과외가 성행한다는 말도 전한다. 요약본으로 시험 위주의 공부만 하는 연수생도 있어 현직 변호사들 사이에서는 연수원생들의 실력이 예전보다 저하되어 간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고 했다. 연수원 성적 우수자가 판결문도 제대로 못 쓰는가 하면 변호사 시보 가운데는 우리나라 법정이 미국 법정처럼 구술 변론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이들도 있다며 낙담을 표시했다. 미국 법정 드라마에 익숙한 탓이다.
그러나 현재의 이런 변호사 업계의 위기 상황이 오히려 기회로 작용한다는 긍정적 시각도 있다. 몇 해 전 국선전담변호사 모집 때는 인원이 미달되는 지방이 속출했지만 현재는 우수한 변호사 인력이 국선전담변호사를 희망한다. 결국 국선전담변호사제도의 활성화가 이뤄질 수밖에 없다. 서민을 위한 무료 법률상담 확대는 가장 큰 이득이다. 일례로 삼성법무팀으로 구성된 삼성법률봉사단은 새로운 법률 서비스의 방향을 제시하며 변호사의 문턱을 낮추었고 대한법률구조공단 역시 무료법률상담을 받을 수 있는 인구를 점진적으로 전국민의 50% 가량으로 확대 실시할 예정이다. 새로운 법조인력 필요성에 대한 인식도 높아지고 있다. 법무부는 국가 송무를 전담하는 ‘정부법무공단’을 설립·운영할 방침이고 경찰도 5년 계획으로 300명 이상의 변호사 인력을 경찰 내에 배치할 계획이다. 외국계 기업들도 헤드헌터를 통해 능력있는 변호사를 찾아나서고 있어 헤드헌터 업체인 미국계 서치펌 펠코리아, 휴먼터치, 헤드헌팅사 엔터웨이 등도 변호사 인력 수급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사법연수원의 연수생 생활지도를 맡고 있는 김종민 교수는 “연수생들이 직접 해외의 법률현황을 공부할 수 있도록 해외연수를 장려하는 한편 연수생들은 자기 분야를 개척해 나가고 새로운 법률서비스를 개발하는 쪽으로 마음가짐이 변화하고 있어 발전적 측면이 크다”고 했다.
김 교수는 연수생들이 다양한 분야로 진출하면서 기업이나 정부부처, 시민단체 등에서 변호사 인력의 필요성을 새롭게 인식하게 된 것도 높이 평가했다. 사법연수원 홈페이지의 구인란에는 50여건 안팎에 머물던 구인 공고가 현재 100여건이 넘을 정도로 늘어났다. 올해 처음 법무팀이 조직된 GS 건설에 입사한 김규창(33)씨는 “법적 분쟁 사례가 많은 분야라 도전 의욕이 생긴다”고 했다.
그는 연수원 수료 시절 막연하게 가졌던 불안감을 능동적인 태도로 극복했다. 연수원 생활 2년째인 박마리(30)씨는 외교통상관련 업무에 관심이 많아 금감원이나 외교부로 진로를 희망하고 있다. 뉴욕대에서 법학석사과정을 마친 그는 국제통상법, 국제거래법 등의 학회 활동을 하면서 국제기구 견학도 가고 토론이나 세미나를 활발하게 벌이고 있다. 성적이 아닌 실력과 노력 순으로 법조계의 스펙트럼이 재구성되고 있음에 많은 이들의 시선이 향한다. 국민 위에 군림하던 법조계의 관행을 깨는 열쇠는 결국 위기에서 비롯되고 있다.
출처 : 조선일보 이선정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