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따라서 읽어봅시다. 賓은 손님 빈!”
“손님 빈!”
5일 오후 한국외국어대 인문과학관 2층 대강당. 한여름 대학 강의실이 ‘서당’으로 변해 있었다. 진행 중인 수업은 ‘○○○ 속성 한자특강’. 강사가 크게 훈과 음을 선창하면, 학생들이 더 크게 따라 외쳤다. 때는 방학 중인 토요일. 아스팔트라도 녹일 듯 무더운 날씨였지만, 강의실을 메운 200여명의 표정은 진지하다 못해 비장하기까지 했다.
“무조건 적지 말고 뜻을 이해해야 외우기 쉬워요. 집(?) 아래 재물을 나타내는 ‘貝’자가 들어 있죠? 집에 손님이 올 때는 뭔가를 대접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천천히 써보세요.”
이 강좌를 듣고 있는 3학년 이호민(25)씨는 “삼성에 입사하는 게 목표”라고 했다. “솔직히 취업 때문에 한자 공부하는 거죠. 삼성에서 한자시험 자격증 소지자에게 가산점을 주니까요. 아마 이 강의 듣는 사람들 거의 다 취업 때문일걸요.”
‘한자 열풍’이 대학가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방학을 맞은 대학 강의실에서 한자 강좌가 진행 중이고, ‘한자 스터디’ 모임을 만드는 학생들도 늘고 있다.
서울시내 주요 대학에서 한자 강좌를 운영하고 있는 성균관서당 서영철 대표는 “건국대, 서강대, 중앙대 등 서울 지역 7개 대학에서 11개 강좌를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1997년 숭실대에서 처음 대학생을 대상으로 강의를 시작할 때만 해도 학생회나 학교측 반응이 시큰둥했습니다. ‘그걸 누가 듣겠냐’는 식이었죠. 그런데 요즘엔 각 학교 학생회에서 개설해 달라는 문의가 빗발칩니다.” 학생 수도 매년 20~30%씩 늘어나는 추세다. 그는 “요즘 대학생들은 한자를 게임용어처럼 ‘필수 아이템’이라고 부르더라”며 “필수 아이템을 먹어야(장착해야) 취업 전선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말”이라고 강조했다.
지난해 서울대를 졸업하고 취업을 준비 중인 김현수(28)씨. 7월부터 일주일에 두 번씩 한자 스터디를 하고 있다. 김씨는 “혼자 문제집 풀고 공부하다가 안 되겠다 싶어 스터디 그룹을 꾸렸다”며 “대기업이나 공사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거의 다 한자능력시험 자격증을 따놓기 때문에 혼자만 안 보면 그만큼 점수를 잃는 셈”이라고 했다. 7월 한 달 동안 집중적으로 스터디를 했다는 이평화(외국어대 4학년)씨도 “요즘 주위 친구들을 보면 세 명 중 한 명은 한자를 공부한다”고 했다.
학생들이 이처럼 한자에 ‘올인’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한자 시험을 채용과정에 넣거나 한자능력검증시험 자격증 소지자에 대해 가산점을 주는 기업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피말리는 취업 경쟁에서 한자 능력이 중요한 변수로 떠오른 것. 한 취업 포털사이트에 따르면, 올해 한자 시험을 볼 계획인 기업은 37개. 삼성은 한자급수자격검정회, 한국어문학회, 한국외국어평가원, 한자교육진흥회 등 4개 기관의 한자능력자격 3급 이상 보유자에 대해 직무적성검사 전형시 가산점을 부여하고 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경제적으로 급부상한 중국을 비롯해 일본, 동남아시아 등 ‘한류’ 열풍이 불고 있는 한자권 국가의 비즈니스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추세를 반영한 것”이라고 말했다.
금호아시아나와 현대중공업은 채용시 주관식과 객관식이 혼합된 한자시험을 보고 있고, 두산그룹 역시 지난해부터 한자시험을 도입했다. 대덕전자·SK생명·한국공항공사·한국전력공사 등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채용시 한자 시험을 볼 계획이며 LG유통·한국마사회·신한은행도 한자 시험 도입을 검토 중이다.
하반기 대규모 기업 공채를 앞두고 대학들도 비상이 걸렸다. 학생들의 한자 능력을 강화화기 위해 학교 차원에서 지원을 하는 대학도 생겼다. 연세대는 문과대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자능력시험 대비 집중세미나’를 개설했다.
출처 : 조선일보 허윤희, 박수찬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