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엔 실업자들의 마음이 더 춥다.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일상(日常)에서 더욱 소외를 느낀다. 통계청이 공식적으로 파악한 실업자만 87만명(지난 10월 기준). 기자는 지난달 말 서울 강남종합고용안정센터에 3일간 입소, 실업자 18명과 함께 교육받으며 마음속 얘기를 들었다. 그들이 서로 나눈 좌절과 부활의 꿈을 소개한다.
안경을 쓴 중년남성이 손을 들었다. “얼마 전 한 외국계 은행에서 영업사원을 뽑는다고 해서 갔습니다. 경력과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거절 당했어요.” 미국 유학을 다녀와 지방대 전임강사, 대기업 차장을 지냈다는 윤모(53)씨의 목소리에선 쇳소리가 났다. “특목고에 다니는 딸만 보면 죄책감이 들어요.” 윤씨는 “150만원만 받을 수 있다면 어디서든 일하겠다”고 했다. 최모(50)씨가 거들었다. “주눅이 들어요. 요즘 젊은이들 이력서며, 자기소개서가 너무 화려해서.” 명문대를 졸업해 30년간 종합상사에서 일했던 최씨. 그는 2년 전부터 실직상태다. 그는 젊은 세대에게 밀리기 싫어 얼마 전 중국어학연수까지 다녀 왔다고 했다. 그의 수첩엔 여러 기업의 채용일정이 새까맣게 적혀 있다.
명문K대를 나와 회계사시험을 준비하다 떨어진 이모(33)씨는 7개월 전부터 취업준비 중이다. 수십 곳에 원서를 돌렸지만 연락 온 곳은 한 군데도 없다. “제가 탄 엘리베이터에 다른 사람이 안 타잖아요? 그러면 ‘저 사람도 내가 백수라 피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어요.” 목소리가 풀이 죽어 있다.
이 강사는 이 대목에서 말했다. “‘난 안 돼,’ ‘난 왜 이 모양일까?’라는 생각을 버리세요.”
지방대를 졸업한 후 한 대기업의 고객관리직 등으로 일하다 해고된 박모(여·29)씨.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기에 억울했어요. 한동안은 회사가 다시 불러줄 거라는 생각에 휴대폰만 바라보고 지내기도 했죠. 하지만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요.” 발표가 끝날 때마다 참가자들은 박수를 쳤다. 첫날은 그렇게 끝났다.
둘째날은 자신의 장·단점을 파악하는 지피지기(知彼知己)의 날. “면접에서 우리의 능력을 입증해야 합니다. 겁먹지 마십시오.” 최영숙(50) 강사가 말했다. 올해 초 소령으로 전역한 이모(45)씨가 일어섰다. “사무직에 응시했습니다. 면접자가 ‘한 때 장교였던 사람이 허드렛일 할 수 있겠냐’고 비꼬는 투로 묻더군요.” 어떻게 대응했냐는 질문에 이씨가 답했다. “막 화를 냈죠. 그런데 이제는 이렇게 말할 겁니다. 저는 올해 초 소령으로 전역했습니다. 군대에서 치밀한 작전계획과 리더십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컴퓨터 활용능력도 틈틈이 길렀습니다. 나이는 좀 많지만 젊은 친구들보다 경험이 풍부합니다.” 큰 박수가 터져 나왔다. 직무능력 100여 가지 중 자신에게 해당되는 것을 체크할 때는, 참가자들 대부분이 절반 이상을 표기했다. “나도 쓸모가 있구나.” 윤모(여·33)씨가 미소를 지었다.
셋째날은 주위사람들을 통해 ‘구직 네트워크’를 만드는 실습을 하는 시간이 하이라이트였다.
“취업정보는 절반 이상이 비공개입니다. 주위에 ‘백수’라는 사실을 소문내시고 인맥을 활용하세요.”(최 강사)
“백수된 게 자랑도 아니고…”라며 얼굴을 붉히던 이모(33)씨가 고민 끝에 수화기를 들었다. “형, 혹시 형네 회사 회계파트에 채용계획이 있나 해서….”
실습이 끝난 후 참가자들은 옆에 앉은 사람에게 ‘채용장’을 써서 건네줬다. 사흘간 이들은 서로 비난보다는 칭찬을, 야유보다는 박수를 더 많이 주고 받았다. 젊은 이들은 나이 든 이들에게 영어이력서 작성법, 보기 좋은 이력서 서식 등을 알려줬다. 중년층은 젊은이들에게 “젊음만큼 큰 재산이 어디 있느냐”고 격려했다.
출처 : 조선일보 오해정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