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3월 말 서울역 앞 대우빌딩 5층. 대우실업 신입사원을 뽑는 면접시험장에 지원자 A 씨가 들어섰다. 한 면접관이 질문을 던졌다. “영어 성적은 괜찮은데 전공시험 점수가 왜 이렇게 나쁜가?”
학부와 대학원에서 법학을 전공했다는 지원자의 답은 당돌했다. “출제자 책임도 있습니다. 상법 책의 구석에서나 찾을 수 있는 문제를 냈으니….” 점수는 낮게 나왔지만 실력만큼은 자신 있다는 항변이었다.
잠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은 면접관은 “그럴 수도 있겠군” 하며 씩 웃었다. 면접관은 합격을 뜻하는 별 세 개와 함께 ‘꼭 붙일 것’이라는 메모를 덧붙였다. 면접관은 김우중 당시 사장. A 씨는 옛 대우 계열사의 사장으로 활약 중이다.
나중에 그룹 전체가 산산조각 나는 아픔을 겪었지만 대우의 채용 현장엔 활기가 넘쳤다. 다른 그룹도 사풍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도전정신과 패기를 신입사원의 핵심 덕목으로 꼽은 것은 비슷했다. 틀에 박힌 모범답안을 외우는 지원자보다는 투박해도 의욕이 넘치는 젊은이를 선호했다.
이렇게 선발된 인재들은 1970년대와 80년대 한강의 신화를 창조한 주역이 됐다. 공공부문 종사자들의 역할을 폄훼할 뜻은 없지만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을 민간기업이 이끈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취업난의 시대를 사는 요즘 대학생은 불행하다. 유창한 외국어 능력과 해박한 전공지식으로 무장해도 번듯한 일자리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 대기업의 적성검사 기출문제를 샅샅이 헤집고 취업용 성형수술을 받을 생각까지 한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공무원 또는 공기업 취업에 모든 것을 거는 ‘공시족(公試族)’이 늘고 있는 현실이다. 대학가에서 공기업 취업자는 ‘신의 아들’이고 사기업에 들어가면 ‘사람의 아들’로 불린다는 말을 듣고 반신반의했다. 아무리 직장의 안정성이 중요해도 한국을 대표하는 글로벌 기업의 위상이 이 정도로 초라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본보 대학생 인턴기자들에게 물으니 사실이라고 입을 모았다. “고시 합격자나 금융 공기업 취업자는 부러워하지만 민간기업에 입사하면 잘 안 풀렸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고 했다.
공시족만 탓할 일은 아니다. 이들은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기에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하루아침에 일터를 잃는 봉급생활자의 비애를 목격했다.
경제를 살릴 능력이 대선 주자의 경쟁력으로 통한다. 각 후보 진영은 성장률을 높이고 일자리를 늘린다는 공약을 마련 중이다. 하지만 젊은 층의 기업가 정신을 되살리지 못하면 어떤 처방도 백약무효다. 공시족 이상 열기를 가라앉히는 것은 성장 잠재력을 회복하는 과제만큼이나 절실한 경제 현안이다.
직업 선택은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의지에 달린 문제다. 다만 연봉 몇백만 원 차이에 흔들리지 말고 20년, 30년 뒤를 내다보고 결정하라는 LG패션 구본걸 사장의 충고는 귀담아들을 가치가 충분하다.
일터와 자신의 비전을 놓고 고민하는 대학생과 인재 존중을 약속하는 기업. 올봄 캠퍼스의 취업설명회에서 만나고 싶은 풍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