쓴소리도 겸허히 듣고 또 듣고
이사회는‘耳사회’로 파격 변신
“귀를 열어야 미래가 보인다.”재계 최고경영진이 밖으로, 안으로 귀를 열고 있다.
이해관계가 없는 외부인사들의 객관적인 목소리를 담거나 일반 직원의 번득이는 아이디어를 신속히 포용해내는 방향으로 경영자문의 채널을 진화시키는 것이다.
이는 그간 최고경영진이 경영의 조언을 구하는 채널이 중역회의, 이사회, 민ㆍ관 간담회, 산업동향보고서 등 ‘성층권’에 머물렀다는 반성 때문이다. 이젠 전문가와 국민, 말단 직원의 진솔한 충고가 넘쳐나는 ‘대기권’에서 생기 넘치는 대안들을 마련하겠다는 의지다.
귀를 키우는 이유는 다양하다. 어떤 기업은 미래계획 및 신사업의 시사점과 반향을 얻기 위해, 다른 기업은 투명경영을 공고히 하거나 불합리한 제도를 개선하기 위해서다. 일부 그룹은 ‘채찍질하는 이사회’로 업그레이드하면서 사외이사의 권한을 대폭 강화했다.
▶커진 귀에 미래를 담자=삼성은 지난해 5월부터 시민단체, 노동계, 문화예술계 등 각 분야 주요 인사 8명으로 구성된 ‘삼성을 지켜보는 모임(삼지모)’을 운영하고 있다. 삼지모는 ‘사회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반성으로 시작됐다.
지난해 6월 1차 모임을 한 이후 분기마다 모임을 열고 출자총액제한제도, 노사문제 등 재계 현안을 논의했으며, 이달 중 다시 모여 에버랜드 전환사채(CB) 재판건 등에 대해 토론하고 이학수 부회장 등 그룹 수뇌부들에게 논의내용을 전달할 계획인 것으로 전해졌다.
그룹 관계자는 “삼지모는 삼성의 장ㆍ단점과 나아가야 할 방향 등에 대해 충고하고 회사는 겸허히 수용한다”고 말했다. 삼지모는 작년 삼성에 8000억원 사회공헌을 계기로 더욱 몸을 낮출 것을 권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자동차는 오는 4월 중 윤리위원회를 출범시킬 예정이다. 지난 9일 주주총회에서 이사회 외 위원회를 둘 수 있도록 정관을 변경한 데 따른 조치다. 명망 있는 법조인과 경제 관련 전공 전문가, 환경 등 분야의 시민단체 인사 등이 참여할 윤리위원회는 현대차의 투명경영 방침에 맞춰 부당 내부거래가 있는지, 각종 경영 사안이 풍속과 법규에 부합되는지 등을 검증하게 된다.
외부 인사와 사내외 이사들이 참가해 토론한 윤리위원회 개최 결과는 이사회에 보고돼 경영에 반영된다. 강제력은 없지만 최고경영진이 적극 수용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있어 강한 힘을 발휘할 것으로 예측된다.
최태원 SK 회장은 다양한 지인(知人) 그룹과 비정기적인 모임을 가지면서 경영 개선 및 미래전략의 시사점을 얻고 있다. 최근 미국 출장에서도 최 회장은 공식적인 업무 활동을 벗어나 사적 모임을 가지며 그룹의 방향에 대해 조언받았다.
▶채찍든 사외이사에게 귀를 가까이 더 가까이=SK그룹의 경우 공식적인 외부 자문기구는 없지만 사외이사들이 비교적 활발하게 활동함으로써 사실상 자문기구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는 평가다.
SK㈜는 이사회 내에 내부자거래위원회, 투명경영위원회, 제도개선위원회, 전략위원회 등 6개의 위원회를 만들었다. 특히 투명경영위원회는 올해에 두 차례 모임을 갖고 지난해 공정거래자율준수프로그램 운용실적을 검토하기도 했으며, 전략위원회는 회사의 전략 방향을 수립해 실행을 사전에 검토하는 역할까지 담당하고 있다.
법조인을 스카우트해 구성한 ‘윤리경영 총괄’은 각종 사업이나 정책의 합리성과 적법성을 필터링하고 있다. SK그룹은 최근 사외이사와 감사위원이 수시로 경영에 관여할 수 있도록 이들이 언제나 회사에 와서 자문과 감시할 수 있도록 사무실을 신설했다.
포스코 사외이사의 위력은 엄청나다. 회사 중대사를 좌지우지하는 권한이 있다. 이사회 멤버 15명 가운데 무려 9명이 사외이사다. 이사회 의장과 최고경영자(CEO)가 분리돼 있고, 이사회 의장은 사외이사 가운데 한 명이 맡는다.
이사회 의장-CEO 분리안 아이디어도 사외이사가 냈다. 포스코 사외이사들은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는다. 지난해 12월 이사회에서는 ‘임원 장기성과급제’안을 사외이사 전원 반대로 부결시켰다.
‘바람막이’ 역할도 한다. 이구택 회장 임기 만료 직전 각종 ‘낙하산’ 후임자설(說)이 무성했지만 사외이사들은 이 회장을 다시 낙점했다. 포스코 사외이사들은 이사회 내에 만들어진 평가보상위원회, 내부거래위원회 등에 참석해 제대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대한통운 내부에는 월평균 한 차례 정도 팀장급 7~10명이 참가하는 ‘투자심의위원회’가 가동된다. 신규 사업과 미래전략의 타당성, 사업성, 전망, 자금조달방법 등에 대해 냉정하게 검증하는 ‘기업판 메니페스토’ 활동이다. 위원회 토론 결과는 임원회의에서 반영된다.
아시아나항공은 고객서비스가 바뀔 때 외부 전문가를 초빙해 사전 품평회를 여는 경우가 많다. 다음달 8일에는 와인품평회가 열려 기내 와인을 선정하게 된다.
▶CEO를 꿈꾸는 말단 직원의 생기 넘치는 목소리도 들어라=김윤 삼양사 회장은 내부의 얘기를 정례적으로 듣는다. 4~10년차 직원들도 구성된 ‘사원이사회제(C&C Board)’는 11년째 김 회장의 중요한 경영자문 창구가 되고 있다. 연구 완료된 내용은 3개월에 한 번씩 김 회장에게 직접 보고된다. ‘해외 지역 전문가 제도’ 등 많은 개선방안이 사원이사회에서 나왔다.
기아자동차는 조직 내부 상하 간 커뮤니케이션을 원활하게 하자는 취지로 말단 사원부터 부장급까지 직원이 고위 경영자와 직접 대화를 하는 창구인 ‘차세대위원회’를 가동하고 있다. 정의선 사장이 기획실장 시절 만든 차세대위원회는 현재 기획실장을 맡고 있는 최순철 부사장이 유일한 ‘경청자’로 참가한다. 차세대위원회는 대고객 ‘Q서비스’ ‘스쿨존 지킴이’ 사회공헌활동, 직원들의 사기진작을 위한 ‘리플레쉬휴가제’를 만들었다.
산업1부
출처 : 헤럴드경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