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CEO]김주성 세종문화회관 사장
"원칙은 수시로 변경 가능한 '지도'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든 항상 정북을 가리키는 '나침반'이어야 한다" 스티븐 코비 박사가 자신의 책 '원칙 중심의 리더십'에서 강조한 말이다.
전문경영인 출신으로 문화예술단체 경영의 새로운 전범(典範)을 보여주고 있는 김주성 세종문화회관 사장(60). 우리나라 문화예술단체의 상징적 존재인 세종문화회관에 불고 있는 개혁과 변화의 중심에는 원칙주의자 김주성 사장이 있다.
# 도전
김 사장이 세종문화회관 CEO로 부임한 것은 지난 2005년 12월. 그가 취임할 때까지만 해도 세종문화회관 벽에는 경영진을 비난하는 현수막이 어지러이 붙어 있었다. 노조원들은 천막을 치고 농성을 벌이고 있었고 조직은 금방이라도 와해될 것 처럼 불협화음을 내고 있었다.
"사장직 제의를 받고 조직을 들여다보니 문제가 한두가지 아니었습니다. 경영진과 노조원 사이에는 깊은 불신이 자리잡고 있었고 조직은 목표를 상실한 채 표류하고 있었죠. 조직의 존폐 문제가 거론될 정도였으니까요."
김 사장은 '사서 고생을 한다'며 말리는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사장직을 수락했다. "33년간 코오롱 그룹에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며 쌓은 경험을 필요하다고 하니, 한번 멋지게 해보자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곳에서 도전하고 성취하는 것이 제 인생인 모양입니다."
연세대 철학과 출신인 김 사장은 학군(ROTC) 장교로 군대를 제대한 뒤 1973년 코오롱에 입사했다. 2004년 코오롱그룹 부회장으로 퇴임할 때까지 30여년 간 회장 비서실장, 기획조정실장, 구조조정본부 사장을 역임한 전문경영인이다.
특히 1994년 노사문제가 심각했던 코오롱 구미공장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노조로부터 파업가부 투표에서 2년 연속 부결을 이끌어내는 등 노사문제에 정통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IMF 이후에는 그룹구조조정 본부장으로서 사업구조 재편 작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철학을 전공한 덕분일까, 김 사장은 특히 사물의 본질에 늘 관심을 둔다. 인간관계도 기업경영도 본질에 충실할 때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원칙을 지키는 일에서는 단 한치도 양보하지 않는다.
그런 그의 기질은 대학 시절 연세대 학보인 연세춘추에서 기자로 활동하게 만들었고 학군(ROTC) 장교로 군대에서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도록 했다. 특히 궂은 일을 마다 않는 그의 삶을 관통하는 철학적 가치가 궁금했다.
"그 많은 일을 하는 동안 제가 지키고자 했던 가치는 이런 것입니다. 원칙, 정직, 열정, 솔선수범, 분야에 대한 전문성과 단호한 결단력입니다."
# 변화
김 사장은 부임 이후 조직을 추스르는데 힘을 쏟았다. 산하 9개 예술단 단원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노동조합의 불신을 해소하기 위해 조직을 강도높게 개혁했다. 그 결과 오히려 노조가 김 사장을 지지하고 나서는 현상이 발생했다.
노조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예술단원의 적극적 호응으로 장애인 및 복지시설 등 소외계층을 찾아가는 '함께해요 나눔 예술' 횟수가 240회로 두 배 들어 났고, 올해에는 시민 누구나 1000원만 내면 한 달에 한 번 수준 높은 공연을 볼 수 있는 '천원의 행복'도 내놓을 수 있었다.
또 비효율적으로 운영돼온 컨벤션홀을 클래식 전용 공연장으로 보수해 세종체임버홀(443석)을 개관하고, 소극장 역시 오페라, 뮤지컬, 연극 등을 공연할 수 있는 750석 규모의 공간으로 리모델링에 착수해 예술계의 호응을 얻고 있다. 기존의 주차장 공간을 '예술의 정원'으로 바꿔 오는 4월부터 시민들에게 만남의 공간을 제공할 예정이다.
이 과정에서 김 사장은 도전적이고 성취지향적인 면모를 보였다. 과거 수동적 관행에서 벗어나 목적지향적으로 예산을 편성함은 물론 원가개념을 도입하여 불필요한 요소를 배제한 예산집행과 관리를 통해 원가절감을 실현하고 있다.
그러나 김 사장 개혁의 백미는 다른 데 있다. 수년 전부터 난항을 거듭하던 예술단원들의 평가문제에 대해 노사간 합의를 이뤄낸 것이다.
"저는 단원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평가 받지 않는 예술단원이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는가? 또한 단원을 평가하지 않는 단장이 훌륭한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가'라고 말입니다." 타 국내 예술단체에서도 지금까지 매듭짓지 못했던 단원 평가 문제를 예술단체 노조 가운데서 가장 강성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세종문화회관에서 그는 관철해냈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 "CEO가 구성원들에게 신뢰를 얻어야 합니다. 저는 저희 구성원들이 저를 신뢰하고 저의 언행일치에 대해 인정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 사장의 자신감은 사심 없는 원칙과 솔선수범에서 기인한다. "저는 여기에 개혁을 하러 온 사람입니다. 임기 3년 동안 월급이나 받고 자리 보전하다 떠나기 위해 온 것이 아닙니다. 주위에서 '뭣하러 그렇게 험한 곳에 가느냐'며 말린 사람이 많지만 전문경영인이 예술단체를 잘운영해서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했다는 선례를 남기고 싶습니다."
CEO로서의 보람과 성취감을 묻고 싶었다. "도저히 혼자 힘으로는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은 거대한 바위가 어느 순간 미동하고 이윽고 크게 흔들리득 변화하는 짜릿한 경험을 그동안 많이 했습니다. 그렇게 조직을변화시키고 혁신하는 쾌감과 희열, 성취감으로 지금까지 살았습니다."
# 소신
김 사장은 부드럽고 온화한 표정을 지니고 있지만 원칙 앞에서는 단호하고 강한 면모를 유감없이 과시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세종문화회관 대관료 문제.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 대관료 외에 공연 제작사에 매출액의 일부를 추가로 내도록 하는 입찰제를 도입해 지나치게 수익성을 추구한다는 비판에 대한 입장을 물었다.
다.
"세종문화회관은 서울시민의 세금에 기반을 둔 만큼 공익성을 본질로 하는 문화시설입니다. 다만 국민의 세금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 자체적인 수익 기반을 확보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죠. 회관 입장에서 당연히 수익을 낼 수 있었던 부분을 간과했던 과거와 달라졌기 때문에 대형 뮤지컬 제작자들의 반발이 있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김 사장의 논리는 이렇다. 한두달 씩 장기공연을 하면서 70∼80억원씩 버는 상업공연의 경우에 하루 공연에 들어가는 회관측 원가가 4000만원을 넘는 상황에서 하루 1000만원의 대관료만 받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대형 뮤지컬 공연이 회관을 장기간 독점 사용하는 동안 무용, 클래식, 국악 등 순수예술은 무대에 오를 기회를 상실하는 만큼 이를 진흥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기 위해서도 돈을 많이 버는 공연에는 매출액의 일정 비율을 회관측이 받는 것이 공평하다는 입장이다.
"세종문화회관이 수익을 많이 낸다고 해서 사장이 직원들 보수를 올려줄 수도 없고 보너스를 책정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회관 입장에서 문화예술계와 단순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이렇게 할 필요도 없지 않겠습니까? 제가 부임한 이후 대관료는 오히려 낮췄다는 점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회관 뒷편의 주차장을 '예술의 정원'으로 조성하면서 연간 수십억원의 운영 수익을 포기한 것 또한 그가 어디에 우선 순위를 두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임기를 마치고 떠날 때 문화예술인들로부터 "예술계를 위해 애 많이 썼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 김 사장의 꿈이다. 그러나 그의 '소박한 ' 꿈이 그저 '작은' 꿈으로만 끝날 것 같지는 않다.
출처 : 머니투데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