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의 새 역사 창조에 장엄한 시동을 걸어 제2 창업의 영광을 위해 이 한몸을 바치겠습니다.
미래지향적이고 도전적인 경영을 통해 90년대까지는 삼성을 세계적인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킬 것입니다.
” 지난 87년 12월 1일. 서울 호암아트홀에 모인 삼성그룹 임직원들 앞에서 당시 46세의 이건희 부회장이 새로운 삼성그룹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내놓은 일성이었다.
말 그대로 이건희 회장은 20년 만에 삼성그룹을 14조원대(세전) 이익을 내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삼성이 전 세계가 주목하는 기업으로 성장한 배경에는 다양한 요인이 있지만, 재계에서 첫 손으로 꼽는 것은 이건희 회장의 리더십과 경영비전이다.
87년 취임과 함께 밝힌 제2 창업, 93년의 ‘신경영 선언’ 그리고 최근의 ‘창조경영’에 이르기까지 글로벌 경쟁 속에서 강력한 변화와 혁신을 이끌어 왔다는 것이다.
황인학 한국경제연구원 기업연구본부장은 “중요한 순간마다 끊임없는 변화를 이끈 이건희 회장의 리더십이 삼성그룹이 있기까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서 “시류를 읽고, 비전을 제시하는 판단능력이 이건희 리더십의 핵심”이라 설명한다.
고비 때마다 결단력과 혜안으로 삼성그룹을 세계 최고 수준의 기업으로 끌어올렸다는 것. 이 회장의 이런 리더십은 해외에서 더 인정받고 있다.
해외 언론과 단체들이 발표하는 ‘존경받는 기업’과 ‘기업 지도자’에 이건희 회장은 빠짐없이 꼽힌다.
국내 기업인으로선 흔치 않은 일이다.
특히 자국 기업들과 치열하게 경쟁하는, 일본 언론들의 관심은 각별하다.
일본의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는 지난해 7월 ‘글로벌 재벌 삼성의 강점’이란 칼럼에서 “삼성은 이건희 회장의 리더십에 의해 97년 외환위기 이전부터 혁신을 준비했다.
이를 통해 글로벌 기업으로의 변신에 성공했다”고 평가했다.
■ 혁신적 리더십 ■ 이건희 회장의 리더십은 특유의 ‘전략경영 화두’에서 잘 드러난다.
93년 ‘신경영’을 통해 글로벌화의 기초를 마련하고, IMF 위기 때에는 ‘비상경영’을, 21세기에 들어서는 미래의 핵심기술을 찾는 ‘준비경영’과 ‘창조경영’을 강조했다.
화두형식의 메시지를 명확하고 알기 쉽게 전함으로써 기존의 선입견을 부정하고 새로운 경쟁력을 확립하는 토대를 만든 것이다.
김성국 이화여대 교수는 “이건희 회장의 리더십은 ‘혁신적 리더십’으로 정의할 수 있다”면서 “신경영과 최근의 창조경영이 대표적 사례”라고 강조한다.
93년 이건희 회장은 신경영 선언을 앞두고 ‘비교 전시회’를 열었다.
당시 이 회장은 소니, 필립스, 지멘스 등 일류 기 황인학 본부장은 “신경영이 선언된 90년대 중반은 세계 경제가 격변하던 때”라며 “당시 세계 일류상품을 지향하고, 변화하는 시대상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려던 ‘신경영’의 노력이 오늘날 삼성그룹 경쟁력의 원천이 됐다”고 평가한다.
시대 상황에 맞는 리더십의 전형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97년 외환위기에도 이건희 회장의 리더십은 한몫했다.
95년 발표한 준비경영과 98년 비상경영을 통해 이 회장은 주주중시 경영, 회계 투명성 제고, 능력주의 인사 제도 등을 정착시켰다.
이를 통해 삼성그룹은 위기 극복은 물론 글로벌 기업으로의 변신에 성공했다.
교토가쿠엔대 경영학부 하세가와 타다시 교수는 “이 회장의 리더십은 2000년 IT버블이 붕괴된 이후 삼성이 시가총액 부문에서 소니를 추월한 원동력이 됐다”고 평가한다.
2003년 뉴스위크지는 커버스토리로 이건희 회장을 다루며 그를 ‘은둔의 제왕’이라고 불렀다.
그만큼 대외 활동이나 접촉이 적다는 것이다.
스스로 말하고 나서는 대신 이 회장은 ‘듣기형 리더’로 평가받는다.
실제 이 회장은 그룹의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릴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말이 없다.
대신 무엇이든 한 가지를 깊게 파고들어 본질을 캐내는 작업을 즐긴다.
수많은 영화나 비디오를 보고, 과학이나 IT 관련 책이나 잡지를 즐겨본다.
이러다 보니 미래 경영이나 기술 변화, 글로벌 트렌드를 보는 눈이 탁월해질 수밖에 없다.
김태현 연세대 교수는 “실제 현업은 다른 사람이 하도록 권한을 위임한다”면서 “대신 새로운 화두를 던짐으로써 비전을 공유하고, 각 계열사들이 미래 전략의 가이드라인으로 삼게 한다”고 설명한다.
큰 줄기와 미래 전략을 중점적으로 다루면서 전문경영인과 오너 간 시너지를 극대화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이런 점에서 최근 이 회장의 화두인 창조경영은 주목을 끈다.
93년 발표한 신경영에서 창조경영으로 화두가 바뀌고 있기 때문. 김성국 교수는 “신경영이 소니와 같은 외국의 일류기업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것이었다면 창조경영은 이를 뛰어넘는다는 의미”라며 “창의성과 문화, 아이디어와 디자인에서의 혁신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삼성그룹의 새로운 도약을 위한 노력으로 이해된다”고 말한다.
■ 전략기획실, 관제탑 역할 ■ 이건희 회장이 그룹이 지향하는 바를 제시함으로써 리더십을 발휘한다면, 이를 실행하는 것은 전략기획실(옛 구조조정본부)과 전문경영인들의 몫이다.
이런 점에서 이 회장은 소위 ‘황제경영’을 하지 않는다.
대신 전략기획실을 중심으로 각 계열사 최고경영자(CEO)들이 상호 견제와 균형을 통해 그룹을 이끌고 있다.
삼성 계열사의 한 임원은 “이 회장이 큰 주제를 제시하면, 전문경영인들이 임원들과 힘을 합쳐 이를 실행하고, 전략기획실에서 업무협력과 자원배분, 평가 등을 책임지는 분업체제가 삼성의 특징”이라면서 “기획·실행·평가로 이어지는 전략기획실의 컨트롤 타워 역할은 삼성그룹 시스템 경영의 요체로 볼 수 있다”고 전한다.
이 회장과 전략기획실, 계열사 전문경영인들을 중심으로 한 삼각편대가 삼성그룹 경쟁력의 원천 중 하나라는 주장. 이건희 회장 스스로도 과거 한 인터뷰에서 “구조조정본부가 93년 신경영을 시작할 때 그룹이 한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관제탑 역할을 제대로 해주었다”고 밝힌 바 있다.
반도체와 LCD산업 투자가 대표적 사례다.
최종 결정은 이건희 회장의 몫이었지만, 빠른 실행과 이를 위한 자원 배분, 그리고 철저한 평가를 통한 피드백 등은 전문경영인들과 전략기획실의 공이었다.
황인학 본부장은 “과거 많은 대기업들이 총수가 투자결정부터 실행, 평가까지 모두 하는 방식으로 경영하다가 IMF 위기 등으로 망해갔다”면서 “반면 삼성그룹은 전략기획실이라는 계열사에서 실행하고 전략기획실에서 평가하고 이를 다시 경영에 반영하는 방식으로 부문별 책임경영 시스템이 잘 갖춰졌다”고 분석한다.
전략기획실이 삼각편대의 한 축으로 정보입수와 상황판단, 계획입안과 평가 등의 업무를 효율적으로 관리해 왔다는 평가다.
김태현 교수는 “전략기획실의 사업방향 설정이 잘 들어맞아 왔다”면서 “회장의 아이디어를 스크리닝해 계열사에서 실행하는 과정이 잘 이뤄진 게 삼성그룹 성장의 동력”이라고 말한다.
일각에선 전략기획실과 이학수 부회장이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함으로써 힘이 쏠려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이에 대해 삼성그룹 측은 시스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나오는 오해라고 말한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전략기획실과 계열사 간 분업이 철저하다”면서 “각자의 업무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책임을 지는 ‘시스템경영’이 정착돼 있다”고 말한다.
이건희 회장이 전략기획실을 앞세워 모든 기업경영을 휘어잡는 ‘황제경영’을 하는 건 아니라는 주장이다.
삼성 안팎에선 IMF 경제위기와 자동차 사업 실패 등을 겪으면서 오너 경영 대신 계열사 책임경영이 자리를 잡았다는 평가도 있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계열사 전문경영인들의 권한과 책임이 더 커졌다는 것이다.
■ 인재경영 ■ 리더십과 시스템경영이 자리를 잡았다 하더라도 결국 비즈니스를 실행하는 것은 사람이다.
삼성과 이건희 회장의 ‘인재경영’이 주목을 끄는 이유다.
김태현 교수는 “전문경영인을 포함한 간부들의 인력 수준에서 삼성그룹은 단연 돋보인다”면서 “기본이 돼 있는 인재들을 과감하게 뽑아 이들에게 중요한 역할을 맡기는 선순환 구조가 자리를 잡고 있다”고 말한다.
삼성그룹 인재경영은 핵심인재의 발탁과 육성, 충분한 보상으로 구성된다.
삼성의 S급 인재 영입이나 지역전문가 양성, 다양한 교육 시스템이 사례다.
전략적 인재배치와 육성 시스템이 자리 잡는 데는 단기적인 성과보다 장기적인 인재 관리를 중요시하는 이건희 회장의 ‘인재경영’이 있기에 가능하다.
신경영 10년을 맞은 2003년부터 내세운 ‘천재경영론’이 대표적. 이 회장은 “21세기에는 소수의 천재가 수십만 명을 먹여 살리고, 기업과 국가 발전을 이끈다”면서 인재의 조건으로 ‘창의성’ ‘긍정적 사고’ ‘인간미’ ‘과감한 도전정신’ 등을 꼽은 바 있다.
실력에 따라 차별화된 인센티브는 삼성 인력관리 기술의 핵심이다.
김태현 교수는 “이병철 회장 당시부터 인재 제일주의 정신이 자리를 잡았다”면서 “한쪽에선 우수 인재를 뽑고, 기존 구성원들에게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일터를 주고 실력만으로 평가하고 보상하는 시스템이 그룹 성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고 말한다.
냉정한 평가를 통해 능력을 인정받는 인재들에 대한 이 회장의 신임은 각별하다.
이건희 회장의 인재 기용 원칙인 ‘의인불용 용인물의(擬人不用 用人勿疑)’에서도 잘 드러난다.
‘믿지 못하면 맡기지 않고, 일단 맡겼으면 끝까지 믿는다’는 뜻으로, 97년부터 현재까지 삼성전자를 이끌고 있는 윤종용 부회장과 96년 비서실장에 올라 전략기획실을 이끌고 있는 이학수 실장이 대표적 사례다.
【 이재용 전무 리더십 | 경청과 겸손으로 주위 사로잡아 】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재용 전무(39)의 별명은 미스터 리틀 경청(傾聽)이다.
자신의 주장보다 남들 얘기를 잘 들어준다는 점에서다.
이건희 회장의 경영철학을 그대로 본받은 면이 없지 않다.
이건희 회장은 말 많은 사람보다 묵묵히 실천에 옮기는 솔선수범 유형을 총애한다.
이재용 전무 역시 이런 점에서 이건희 회장을 쏙 빼닮았다.
지난 2001년 삼성전자 경영기획팀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그는 겸손의 극치를 달렸다.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게이오대(MBA)와 미국 하버드대에서 경영학박사 과정을 마친 뒤 본격적으로 경영수업을 받아오고 있지만, 모든 면에서 합격점을 받고 있다.
비록 인터넷사업 부문에서 실패를 맛봤지만 배우려는 자세에서 만큼은 대단하다.
지난해 인사 때 이학수 부회장은 전무 승진 인사 명단에 이재용씨를 포함시켰다.
이건희 회장도 전무 승진을 재가했다.
그러나 이재용씨는 끝까지 전무 승진을 고사했다.
결국 올해 들어서 전무로 승진했다.
그룹 회장이 되기 위해선 단계를 밟아야 한다는 이건회 회장의마음을 이재용 전무가 꿰뚫어 보고 있는 듯하다.
그는 올해 삼성전자 CCO(최고고객책임자: Chief Customer Officer) 자리에 올랐다.
삼성전자 매출액 가운데 해외 비중이 87%에 달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CCO 자리에 어느 정도 힘이 실릴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삼성전자 해외지부만도 총 97개에 달하고, 임원만도 160여명에 달한다.
1월 22일부터 25일까지 이들을 대상으로 글로벌 전략회의를 갖는다.
또한 대형 거래선과의 업무조율도 이재용 전무 임무다.
이건희 회장은 노키아, 애플, 베스트바이, 서킷시티 등과 같은 해외 협력사 CEO들을 만날 때 이재용 전무를 배석시켜 해외네트워크를 완성시킬 것으로 보인다.
이재용 전무는 그동안 외부노출을 꺼렸지만, 성격 자체가 외향적이지는 않다는 게 중론이다.
경복고등학교 시절 학생회장을 맡았다는 점만 봐도, 리더 자질이 충분함을 엿볼 수 있다.
마치 먹잇감을 사냥하는 독수리와 호랑이가 결정적인 순간까지 자신의 의도를 숨긴다는 의미의 채근담 속담인 ‘응립여수 호행이병(鷹立如睡 虎行以病)’을 좌우명으로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출처 : 매일경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