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직원 80% 이상이 기능인 … 잭 웰치 “한국기업, 삼성식 혁신 배워야”
최근 러시아 정부가 삼성중공업에 쇄빙 유조선 건조를 위한 합작회사를 제안했다. 삼성중공업의 쇄빙 유조선은 세계 최초의 극지 운항용 유조선으로 얼음을 깨는 동시에 운반까지 하는 배다. 지금까지는 쇄빙선이 얼음을 깨고 나가면 그 뒤를 운반용 배가 따라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렇지만 이 배는 영하 45도의 극한 상황에서 짐을 실은 채 두께 1.57m의 얼음밭을 뚫고 나갈 뿐 아니라 필요하면 360도 회전까지 한다. 삼성중공업 측은 이를 위해 ‘세계 최저 설계 온도’, ‘세계 최고 전후 방향 쇄빙 성능’, ‘마모에 견디는 특수 도장’ 등 첨단 신기술을 도입했다고 설명한다. 기술 자체는 다른 회사에서도 해결할 수 있었겠지만 중요한 것은 이 회사에 이런 발상을 하는 인재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삼성에서 신기술이 많이 나오는 이유가 무엇일까.
“삼성전자의 국내 채용 인력이 8만명인데 이 중 80~90%가 기술자나 기능인으로, 회사가 이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21일 노동부와 가진 ‘기능장려협약체결식’에서 이 회사 윤종용 부회장이 한 말이다. 소수 천재의 개인적 노력보다는 인재를 중심으로 한 다수 직원들의 협력을 중시하는 대목이다.
기업은 ‘천재보다 인재’
인류사에 길이 남을 천재 중 한 명이라 불리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프로이트의 말처럼 ‘어둠에서 혼자 너무 일찍 깬’ 그가 오늘날 대기업에 간다면? 별 다른 고민도 없이 수로를 통해 달리던 ''물 위의 수레''를 만들거나, 비행기와 잠수함 또는 괘종시계와 방적기 개발에 뛰어들고, 도시 건축이나 인체해부에 몰두하다 수학과 기하학을 사용해 완전한 비례를 추구하고, 조망화법이니 뭐니 하는 기묘한 아이디어를 던지며 모나리자나 최후의 만찬 같은 불후의 미술품들을 척척 쏟아내는, 그래서 ‘최고의 화가’이자 ‘왕의 기술자 겸 건축가’라는 직함을 가지는 일이 가능할까? 그가 천재로 남으려 하는 한, 이는 가능한 일이 아닐 것이다.
아무리 박식하고 창의력이 넘치는 천재라해도 기업에 그의 재능이 필요치 않다면 그를 구할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기업은 언제나 특정 분야에서 천재성을 지닌 인물을 구하는데, 그가 곧 인재이다.
해석학의 대가인 독일의 한스 가다머는 역저 ‘진리와 방법’에서 “예술은 천재의 솜씨”라는 칸트의 명제를 해석하며 천재에 관한 일련의 분석을 행했는데, 그에 따르면 천재의 창조 행위는 취미라는 점에서 범인의 그것과 구별되며, 그 결과는 항상 예술로 평가된다. 그렇다면 인재의 창조 행위는 대중을 혁신으로 이끈다는 점에서 범인의 그것과 구별되며, 그 결과는 기업의 혁신 정도에 따라 평가된다 할 것이다.
인재에 의한 혁신은 동서고금에 늘 반짝이는 보석같은 결과물을 낳았다. 요즈음 드라마로 유명한 주몽의 철기군에서 이런 사례를 접할 수 있다. 주몽의 다물군이 당시 강성했던 한나라 군대는 물론, 한반도 북측을 지배했던 대국 부여에 맞서 고구려를 건국한 배경에는 독창적인 철기 제조법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사가들은 주몽 부족의 철 제련술이 당대 최고 수준으로 발전해 경쟁국의 검을 압도했으며 그 제련법이 ‘초강법’이라 설명한다. 당시 검 제조에 사용되던 주철에 비해 탄소 함유량이 적은 괴련철을 사용했을 뿐 아니라, 끊임없는 시행착오 끝에 날 부분의 강 성분을 극대화했다는 것이다.
초강기술은 한나라가 발전시킨 것이지만 주몽은 이를 단순히 도입하는데 그치지 않고 실험에 실험을 거듭한 끝에 날카롭고 가벼운 검을 얻는 데 성공했다. 그로써 숫자는 미미하지만 전투력은 막강한 군대를 양성해 고구려 건국의 초석을 다졌다는 것이다. 드라마 ‘주몽’에서는 탁월한 초강법 기술로 다물군을 혁신시키는 인물이 나오는데, 기업에 필요한 인재란 바로 그런 인물일 것이다.
팀플레이 잘하는 인재라야
무엇이 우수한 인재의 자질일까. 잭 웰치와 이건희 회장의 인재론을 비교하면 흥미로운 대목이 발견된다.
GE는 글로벌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를 가장 많이 배출한 회사로 알려져 있다. 이런 성과는 인재 발굴과 육성을 기업 경영의 핵심으로 여긴 잭 웰치 전 회장의 경영철학에서 비롯됐다는 평가다. 그는 ‘위대한 승리’에서 글로벌 시대에 적합한 인재의 자질을 ‘4E 1P’로 요약했다. 적극적인 에너지(Energy), 사람들에게 활기를 불어넣는 능력(Energize), 어려운 결정 앞에서 단호한 결단력(Edge), 업무를 수행하는 실행력(Execute), 그리고 열정(Passion)이 그것이다. 잭 웰치의 덕목에서 지식이나 천재성 같은 것은 찾아볼 수가 없다.
이건희 회장은 정리된 형태로 밝힌 바가 없지만 다양한 연설을 통해 인재의 자질을 설파한 바 있다. 이 회장의 지론 가운데 하나가 “인재의 좋고 나쁨은 학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이 갖고 있는 잠재능력에 있다”는 주장이다. 우리 시대가 개성의 시대, 창조의 시대이므로 이러한 시대에 걸맞게 개성, 끼, 즉 창의력이 있는 사람이 요구된다는 설명이다. 그런 맥락에서 “창조의 시대에는 뭔가 튀는 사람들이 필요하며”, 그들을 확보하고 집단화해서 활용하는 것이 기업의 역할이라는 논리도 가능해진다.
삼성전자의 황창규 사장은 이를 보충하여 이 회장이 이른바 I자형 인재보다 T자형 인재를 선호한다고 설명한다. I자형 인재는 한 가지 분야에만 정통하고 다른 분야는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인 반면, T자형 인재는 자기 분야에 정통한 것은 물론이고 다른 분야까지 폭넓게 알고 있는 종합적인 사고능력을 갖춘 사람이라는 설명이다.
이런 설명을 전제하면 두 사람 모두 전략보다 인재가 우선한다는 관점에서 일치하고 있다. 전략의 실패는 인재로 만회할 수 있지만 인재의 부재는 대체할 방법이 없다. 잭 웰치가 업무의 70% 를 인재에 쓴다고 한 말이나 이건희 회장이 업무의 절반 이상을 인재에 쏟는다고 한 말들이 일맥상통함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잭 웰치가 열정, 에너지, 추진력, 실행력 등에 무게를 두는 데 비해 이 회장은 잠재능력, 팀플레이, 시너지 등에 무게를 두고 있어 이 회장의 인재론에는 아무래도 창의성에 더 무게가 실림을 알 수 있다. 달리 말하면 그는 잭 웰치처럼 거침없이 전진하는 열정보다는 탁월한 창의성으로 주위 사람을 이끄는 인화력을 지닌 인재를 선호한다고 할 것이다.
“한국기업, 더 혁신하라”
그러면 인재의 역할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잭 웰치와 이건희 회장의 대답은 ‘혁신’ 한 군데로 모아진다.
“신제품을 누가 빨리 낼지, 생산공정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하는지의 차원을 떠나야 한다. 삼성전자 같은 기업이 하고 있는 혁신이 전 산업, 전 영역으로 확산돼야 한다. 혁신이야말로 한국의 미래성공을 좌우하는 열쇠이다.” 지난 12월 15일 산업자원부가 주최한 부품소재 국제 콘퍼런스에서 잭 웰치가 한 말이다. 그는 한국 기업은 혁신을 떠나서는 미래가 보장되지 않으며 인재의 역할 또한 혁신을 주도하는 데 있다고 못박았다.
나아가 잭 웰치 회장은 혁신을 이끄는 최적의 방법은 보상 체계라고 강조했다. 성과를 내는 직원에게 충분한 보상을 주어 영웅대접을 해주고 그를 역할모델로 삼으라는 것이다. “(인재들의) 영혼과 지갑을 동시에 두둑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재가 단순히 자신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창의적 아이디어로 주위 동료를 일깨워 혁신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은 이건희 회장의 지론이기도 하다. 회사가 원하는 인재라면 보수를 아끼지 말고 대접해야 한다는 점에서도 두 사람의 견해는 일치한다.
이러한 견해에 따른 삼성의 선택은 한 명의 인재가 얼마나 놀라운 혁신을 일으키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삼성전자의 황창규 사장도 그런 인재 중 한 명이다. 그는 미국 매사추세츠 주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 대학과 기업에서 활동하다가 삼성측의 간곡한 설득에 한국행을 선택했다. 해외 명문대 박사로서 한국의 삼성을 택한 이유에 대해 황 사장은, “이 회사(삼성)가 반도체 분야에서 조국을 일본보다 우월하게 만들고 싶다는 의지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라 설명했다. 자신의 의지대로 그는 세계 최초로 256MD램을 개발하여 일본을 추월했고, 이른바 황의 법칙을 발표하면서 삼성전자를 세계 메모리 반도체 1위로 이끄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8억 인구를 살려내다
아마도 이건희 회장의 인재론에서 가장 해석이 엇갈리는 대목이 십여 년 전부터 회자돼 온 이른바 ‘천재론’일 것이다. 이 회장은 95년도에 가진 한 인터뷰에서 “두어 세기전에는 십만명 이십만명이 군주와 왕족을 먹여살렸지만 지금은 한 명의 천재가 10만명, 20만명을 먹여살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를 두고 한 명의 천재를 십만명의 대중보다 중시하는 귀족적 발상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곤 했다. 이런 비판은 단견이다. 더 큰 기업의 경영자가 더 많은 직원을 두게 되듯, 더 뛰어난 인재는 더 큰 책임과 역할을 맡기 때문에.
때로는 십만명이 아니라 백만명, 아니 그 이상도 먹여살릴 수 있는 존재가 뛰어난 인재이다. 국가 조직의 경우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중국은 1960년대말 8억명의 인민들이 이른바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일대 혼란에 빠진 처지였다. 당시 국가 지도자인 마오쩌둥은 국가의 우경화를 막는다는 명분 아래 문화대혁명을 강력히 밀어부치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가 신임하는 총리 저우언라이는 인민의 실생활을 보고서 문혁이 심각한 재앙임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그는 마오에 저항하지 않았는데, 그럴 경우 당과 국가가 분열되어 그나마 유지되는 경제 기반이 붕괴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저우언라이는 총리직을 수행하면서 국가가 경제적 파멸에는 이르지 않도록 불철주야 노력했다. 그의 노력을 두고 후일 덩샤오핑은 “문혁 기간에 저우언라이는 자신의 생각과 다른 말을 하고 다른 일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나라를 구할 사람이 없었다. 그는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수많은 동지들을 지켜냈다”고 평했다. 덩샤오핑 자신도 저우언라이로 인해 최악의 상황을 모면했고, 후일 병석에 누운 저우언라이의 천거로 총리직에 복귀한 경우다.
기자가 만난 중국의 한 인사는 당대를 묘사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문화대혁명 시절 중국은 두 명의 인재에게 기대고 있었다. 한 사람인 저우언라이는 혁명으로부터 중국의 파멸을 막아냈고, 또 한 사람인 덩샤오핑은 혁명이 남긴 가난으로부터 중국 인민을 구해냈다.” 오늘날 많은 중국인들은 두 인재가 8억 인구를 먹여살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인정하고 있다.
출처 : 내일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