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살펴보면, ‘모든 것이 여기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는 영국인들의 자부심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는 의회주의라는 모델을 만들어냈고, 경제적으로는 산업혁명의 시작으로 세계 경제를 이끌어왔다. 사회운동의 중심인 노동조합도 영국에서 만들어졌고, 세계인의 스포츠 축구도 영국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대단한 자존심과 자만심도 2차 대전이후 오늘날까지 계속해서 내리막길을 걸어왔던 것 또한 사실이다. 인정하기는 힘들어도 더 이상 영국이 세계의 공장도, 세계의 중심도 아님을 그들 자신도 잘 알고 있다.
앞으로 어떤 나라가 다시 세계 최강대국이 될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가능성의 문은 모든 국가에게 열려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칼 마르크스가 예측했던 대로 미래에도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영역은 경제영역이라는 데 큰 이견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국부를 창출하는 원천이 구체적으로 어디이고 어떤 산업영역이 고부가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정부 차원에서 성장동력에 대한 정책적 고민을 하고 있고, 국가과학기술 로드맵 작성 등 다양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농업혁명으로 인류의 정착생활이 이루어지면서 1차 산업이 경제의 중심이 되었고,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경제의 중심은 1차 산업에서 2차 산업으로 이동했다.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소위 ‘정보혁명’을 통해 정보사회로 이행했다.
그렇다면 정보사회 이후에 올 사회에서 부가가치의 원천은 어디일까. 각국에서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다. 덴마크의 코펜하겐 미래학연구소는 정보사회 이후에 드림 소사이어티가 올 것이라 주창하며 지식과 창의성이 가치창출의 새로운 원천일 될 것이라 예견했다.
산업에서도 창의성은 성장의 중요한 가치로 각광받고 있다. 오늘날 유럽 국가들은 하나같이 창의성에 기반 한 문화산업에서 미래를 찾고 있다. 특히 영국은 국가적 차원에서 문화산업을 통해 제2의 산업혁명을 불러일으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21세기의 승부처는 문화산업
얼마 전 타계한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 고 피터 드러커는 “21세기 최후의 승부처는 문화산업이다”라고 갈파한 바 있다. 문화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는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고 문화산업의 성장가능성도 누구나 인정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문화산업을 어떻게 진흥하고 문화를 국민의 삶의 질과 어떻게 구체적으로 연결시킬 것인가 하는 정책의 문제이다. 문화산업이 미래 고부가가치의 원천이고 성장의 새로운 동력이 된다면 문화산업정책은 국가의 미래와 국민의 행복을 좌우하는 열쇠가 될 수 있다.
독특한 의자 디자인으로 각광받고 있는 론아라드의 작품
유럽 국가들은 대부분 문화적 기반인프라가 튼튼하고 디자인, 콘텐츠 등 문화산업이 활발하다. 프랑스나 이탈리아는 전통적인 문화예술국가로서 일찍부터 문화산업을 국가적 차원에서 전폭적으로 지원해왔다. 영국의 경우는 아예 문화산업에 대한 정의에서부터 대단히 전향적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문화산업, 문화콘텐츠산업 등의 용어를 사용하지만 사실은 나라마다 이 산업영역을 부르는 용어가 다르다. 용어 사용의 차이는 정책의 기조를 이루는 관점과 철학의 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세계 최대의 문화콘텐츠 강대국 미국은 엔터테인먼트산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고, 문화콘텐츠산업 2위 국가인 일본은 엔터테인먼트 비즈니스라고 부르고 있다. 한편 오늘날 유럽국가 중 문화산업에 대한 정책적 의지를 분명히 보여주는 국가는 영국이다.
창조산업을 미래전략산업으로 육성하는 영국
영국은 문화산업을 ‘창조산업(Creative Industry)’이라 정의한다. 문화의 핵심요소인 창조성을 산업과 접목시켜 사고하고 창조성을 부가가치 창출의 새로운 원천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영국 정부는 1997년부터 창조산업을 미래전략산업으로 육성하고 있다.
조나단 아이브에 의한 애플 아이팟의 모델
2000년에는 디지털콘텐트 육성실천계획 수립을 발표했고, 창작산업 추진반, 창작산업수출진흥자문단 등 범정부차원의 전담기구를 설립하는 등 정책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최근에는 전략수립 및 인력양성, 투자유치 등 공공부문의 역할을 강화하고 있으며, 지적재산권 범죄시스템을 정비하는 등 지적재산권 보호에도 애쓰고 있다.
원래 영국은 오랫동안 문화예술정책에 있어서 ‘소위 팔길이 원칙(arm's length principle)’을 고수해왔다. 직접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팔길이 정도의 거리를 두고 지원한다는 것이다.
문화예술에 대한 지원은 국가가 직접 개입해서 하지 않고 공적 지원과 관련된 실질적 권한을 다른 조직에 양도(devolve)해온 것이 자유주의의 나라 영국의 오랜 전통이었다. 이런 전통은 중앙정부가 문화정책에 관여하고 오히려 주도해온 프랑스식 모델과는 구별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영국 정부의 문화산업에 대한 정책적 지원은 점점 더 적극적으로 변하고 있다. 창조산업이라는 시각에서부터 보여지듯 영국은 문화산업을 미래 성장동력으로 규정하고 정책적인 지원을 하고 있다. 현재 영국의 문화산업정책을 주관하는 부처는 문화미디어스포츠부(DCMS)이다.
영국 정부가 정의한 창조산업의 범주에는 영화, TV, 라디오, 음악, 출판, 소프트웨어, 컴퓨터 게임, 공예, 건축, 공연예술, 디자인, 패션, 광고, 예술품, 골동품 등이 총망라되어 있다. 토니 블레어의 영국은 창조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강력한 정책을 펴왔고, 점잖은 신사의 나라 대신 ‘창조적인 영국(Creative Britain)’을 정책슬로건으로 내걸고 있다.
창조산업으로 제2 산업혁명 이끌어
창조혁명의 주역인 영국의 디자이너, 콘텐츠프로듀서, 건축가, 영화예술인들은 세계문화의 트렌드를 주도하고 있고 영국의 제2산업혁명을 이끌고 있다. 특히 영국의 디자인경쟁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홍콩 첵랍콕 공항을 설계한 노만 포스터, 애플 아이팟을 설계한 조나단 아이브, 독특한 디자인 의자로 유명한 론 아라드, 현재적인 감각의 디자인으로 디자인산업을 부흥시킨 콘란 경 등 창조적인 영국인들은 이제 세계 디자인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런던은 도시별 국내총생산(GDP)면에서 문화의 수도 파리를 제치고 당당히 1위로 올라섰다. 이런 결과는 어쩌면 영국 정부의 적극적인 문화정책의 당연한 귀결이기도 하다.
출처 : 국정브리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