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건강 염려한 유일한 박사의 공인의식… 富 창출해 번영 이끄는 것이 가장 큰 공익활동
CEO는 의도적이든 아니든 이미 공인(公人)이다. 피터 드러커에 의하면 경영이란 경제적 성과 달성을 위한 관리적 기능과 그 성과에 대한 책임인 사회적 기능이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이른바 기업의 사회적 책임(Social Accountability)이 인식돼 왔다. 따라서 기업 경영의 핵심인사인 CEO는 공인이 돼야 한다. 다시 말하면 CEO는 그 기업만의 지도자가 아니다.
말에는 시대적 철학이 담겨 있다. 장돌뱅이·장사치·장사꾼·상인·기업가·사장·최고경영자·CEO. 돌이켜보면 CEO란 단어 뒤에는 이런 무수한 역사적 흔적이 담겨 있다. 그런데 요즘 말을 사용하는 데 오염이 많은 것 같다. 생각을 전하는 귀중한 언어로 아름답고 소중하게 간직하려 들지 않는다.
새파란 연예인들이 쩍하면 ‘공인’ 운운해 대는 것도 마찬가지다. 포르노테이프의 O양이나 B양도 “공인으로서…” 하면서 기자회견을 하는 걸 보면 왠지 쑥스럽다. 10대들의 우상인 어린 가수들이 ‘공인’을 운운하는 것도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엄밀히 말하면 아무리 지명도가 높아 많은 사람들의 선망이 되고 또 영향을 주더라도 연예인은 인기인이지 공인이 아니다. 연예인을 가볍게 보아서 그러는 게 아니다. 연예인이 공인과 같은 사회적 책임감을 갖고 사생활과 연예활동을 건전하게 하겠다는 의지에 대해 시비하는 것도 아니다.
그야말로 인기인은 밤하늘의 반짝이는 스타일 뿐이다. 심지어 20세기 최대의 예술가인 피카소도 거장(巨匠)이라고 하지 공인이라 하지 않는다. 귀족 작위까지 받은 로렌스 올리비에도 위대한 연극인이지 공인이라 하지 않았다. 따라서 잭 웰치와 마이클 잭슨은 다르다. 존 F. 케네디와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다르다.
뭇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서정을 주는 인기인과 마땅히 공익을 위해 헌신하는 공인은 다르다. 인기인이 공인인 양 하는 것도 무리고 공인이 인기인이 되려 해서도 안 된다.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군자화이부동 소인동이불화). 군자는 화합하되 뇌동하지 않고 소인은 뇌동만 하고 화합하지 못한다’고 일찍이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오히려 공인은 인기에 영합하는 포퓰리즘의 노예가 돼서는 안 된다. 언론 플레이를 일삼는, 연예인화를 경계하는 말이다. 또 주가만 관리해 얻는 작금의 CEO 행태도 천박한 심보의 발로가 아닐 수 없다.
CEO란 공인은 묵묵히 주어진 일을 다해 업적과 실천으로 기업과 사회에 헌신(獻身)해야 한다. 인기와 다른 유혹을 이기면서 묵묵히 헌신하기 위해서는 우선 헌심(獻心)이 있어야 한다.
바로 비윤리적, 비도덕적인 또는 불법적인 방법이 아닌 건전한 기업경영을 통해 주주와 투자자 그리고 채권자를 섬기는 마음이 우선이다. 또 고객을 섬기고 종업원과 협력회사를 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와 국가를 위해 마땅히 세금을 내는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기여할 바를 찾아 일익을 담당해야 한다.
한국 기업의 경우 동남아 등에 투자한 후 현지 근로자들을 학대하거나 현지 사회와 국가에서 범법행위를 저지르는 경우가 종종 있어 왔다. 한국인으로서 부끄러움을 느끼게 했다. 한국 대표적 기업은 한때 ‘사카린 밀수’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적도 있다.
CEO란 공인의 자격을 자식에게 무리하면서 세습하는 것도 난센스다. 자선행위라 하더라도 자만심·과시·명성·허영 또는 위장된 야망으로 ‘기부’하는 행위도 진정한 의미에서 기업의 사회적 활동이 아니다. 모름지기 현대 사회의 공인 CEO는 경제적 성과인 가치, 즉 부(富)를 창출해 관계자들의 번영을 꾀해야 한다.
동시에 기업은 사회 속에 존재하므로 건전하게 사회적 책임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럴 때 그 기업도 사회로부터 사랑받는 기업이 될 수 있다. 국민의 건강을 염려하면서 유한양행을 창업한 유일한 박사의 공인의식을 기리고 싶다.
글 : 이해익 리즈경영컨설팅 대표컨설턴트 (haeikrhee@hotmail.com)
출처 ;ECONOMIS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