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타워팰리스, 제 머리에서 나왔지요"
기흥반도체·아산 탕정 단지도 골라… "사업 성공의 90%는 땅에 달려있어"
“1년 안에 서울 강남에 평당 5000만원 시대가 열릴 겁니다.” 작년 4월 서울의 한 음식점에서 처음 만난 삼성전자 부동산개발팀의 노태기(59) 전무는 스치듯 말을 던졌다. 술이 몇 순배 돈 뒤였다.
“에이, 설마 그렇게 오르겠어요?” 기자는 바로 코웃음쳤다. 당시 서울 강남지역 아파트 평당 평균가격은 2300만원, 최고가 아파트로 꼽히는 강남 삼성동 아이파크도 평당 3500만원 선이었다. 당연히 그의 예상에 약간의 과장 내지 허풍이 담겨 있다고 느꼈다. 더구나 대통령이 이미 ‘강남 집값과의 전쟁’을 선포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 예상은 적중했다. 꼭 1년이 지난 올 4월 삼성동 아이파크 평당가는 5000만원을 넘어섰고, 강남 대치동 동부센트레빌 같은 고가 아파트도 5000만원 선을 돌파했다. 호가(呼價·부르는 값)만이 아니라 실제 평당 5000만원 넘는 가격에 거래되는 경우도 생겼다. 지난 5월 초 삼성동 아이파크 73평형이 47억5000만원에 팔렸다. 평당 가격은 6507만원, 당시 강남구 아파트 평균 평당가격(3500만원)의 2배에 육박하는 값이다.
지난 8월 22일 강남 서초동에 있는 개인 사무실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그는 ‘24년 삼성맨’ 생활을 접고 올 3월 퇴직해 새 일을 모색하고 있었다. 만나자마자 1년 전의 일을 끄집어냈다. “허허, 내가 그랬나요? 그거 아무것도 아니에요. 수요가 있으면 값이 오르게 마련이지요. 당시 정부는 각종 규제로 강남 집값을 누르고 있었지만 고급 주택에 대한 수요가 많았거든요. 그러면 집값은 오르게 마련이지요.”
그는 부동산을 전공한 전문가는 아니다. 고려대 법대 출신으로 부동산과는 거리가 멀었다. 1982년 삼성생명에 입사, 부동산투자팀에서 일하면서 부동산과 연을 맺었다. 그리고는 그게 천직이 됐다. 올 3월 삼성전자 전무로 퇴직할 때까지 24년간 ‘삼성 땅’만을 고르고 관리해 왔다. 그는 발로 뛰면서 현장에서 부동산을 익혔다. “전국에 가보지 않은 땅이 거의 없어요. 지금도 부산, 대구의 어느 땅 하면 대략 땅의 특성과 가격을 알 수 있습니다.”
삼성 땅의 ‘산증인’인 그가 숱하게 고른 삼성의 공장용지와 아파트 부지 중엔 주로 삼성전자의 땅이 많다. 삼성전자의 첫 반도체 단지인 기흥·화성 반도체단지(100만평), 아산·탕정 LCD단지(150만평), 현재 공사가 한창인 강남 서초동의 ‘삼성타운’(7500평)이 모두 그의 작품이다. 고가 아파트의 대명사인 강남 타워팰리스도 그의 머릿속에서 나왔다. “기흥·화성 반도체단지는 반도체단지로는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큽니다. 아산·탕정 LCD단지도 LG필립스LCD의 파주 LCD단지(50만평)보다 3배나 큽니다. 수요가 늘어도 2020년까지는 끄떡 없어요.”
그럼 그가 고른 삼성 땅의 값어치는 얼마일까. “글쎄요, 삼성전자만 따져도 장부가로 5조원 가량 될 겁니다.” 그의 말대로 이는 장부 가격일 뿐이다. 이미 삼성이 고른 땅 주변은 상당 부분 개발이 이뤄져 실제 값어치는 수십조원, 어쩌면 그 이상을 호가할 수도 있다. 그래서 부동산 업계에선 “삼성을 따라 부동산 투자하라”는 말까지 돈다.
하지만 재벌이 어디에 땅을 사는지 미리 눈치채기는 어렵다. 재벌 ‘땅 작업’은 극비리에 추진된다. 재벌이 어디에 땅을 산다는 소문이 번지면 일대 땅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아 땅 작업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재벌 땅 작업은 ‘007 작전’을 방불케 한다. “옛날에는 차명을 이용하기도 했고, 부동산 중개인을 내세워 계약을 하기도 했지요. 삼성이 땅을 사는지 눈치채지 못하도록 쥐도 새도 모르게 합니다.”
땅 주인에게 돈을 보내는 것도 은밀히 진행된다. “보통 사들이려는 부지의 땅 주인들 60~70%와 몰래 먼저 계약을 합니다. 그리고 입금은 같은 날 한꺼번에 해요. 소문이 나서 땅 주인들이 갑자기 계약을 깨고 땅값을 올리지 못하게 하려는 거지요.”
땅 작업이 언제나 순탄하지는 않았다. 삼성그룹은 1990년대 중반 서울 강남구 도곡동에 102층짜리 사옥을 지으려고 했다. 초고층으로 지어 상징성을 높이고, 흩어져 있는 전자 계열사를 한곳에 집중시키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주변 아파트에서 주거환경이 망가진다며 반대하는 바람에 구청에서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여기에 외환위기까지 터지면서 사옥 건설 계획은 1998년 좌초됐다. 이건희 회장은 당시 “자식 하나를 잃은 듯한 기분”이라며 아쉬워했다고 한다.
사옥을 지으려고 일대 땅에 투자한 돈은 3000억원. 돈이 묶이면서 자금 부담이 커지기 시작했다. 이때 노 전 전무는 ‘타워팰리스’ 분양을 구상해냈다. 평당 1000만원이 넘는 고가(高價)의 고층 주상복합아파트를 분양해 자금을 조기에 회수하자는 전략이었다.
이 계획은 부동산 시장이 꽁꽁 얼어붙어 있던 당시로선 모험이었다. 더구나 고층 주상복합아파트란 것도 사람들에게 익숙지 않은 주거 문화였다. “당시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가능하다고 생각했어요. 시장이 곧 활성화되리란 판단을 했지요.” 타워팰리스는 분양 초기 미분양이 나기도 했지만 결국 성공했다. 지금은 고가 아파트의 대명사가 됐고 고층 주상복합은 하나의 주거문화로 자리잡았다. 도곡동에서 좌절된 삼성의 ‘강남 사옥’은 지금 서초동 ‘삼성타운’으로 주소지만 바뀌어 진행 중이다.
그는 “사업 성공의 90%는 땅에 달려있다”고 믿는다. 어느 땅을 구하느냐에 따라 사업 성공 여부가 좌우된다는 것이다. “공장용지를 구할 때는 빗물이 어느 강으로 흘러드는지까지 고려합니다. 빗물이 상수원보호구역으로 흘러들면 규제가 까다로워집니다. 그러면 공장 규모를 늘리기 힘들어져 사업이 어려움에 빠질 수 있어요.”
그의 개인 사무실 벽 곳곳엔 ‘○○지역 도시계획도’ 따위의 지도가 잔뜩 붙어있다. 그가 구상하고 있다는 ‘새 사업’이 궁금해졌다. 그는 “지방자치단체와 함께 고급주거단지, 첨단연구단지가 어우러진 미래형 산업단지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삼성 땅’이 아닌 ‘자신의 땅 작업’을 위해 그는 요즘도 시간만 나면 지방으로 내려간다고 했다.
“어느 지역 땅이 유망하다고 생각하느냐”고 했더니 잠시 주저하다 말문을 열었다. “천안·아산·평택처럼 수도권과 접근성이 좋은 곳이 낫겠지요. 당분간 수도권 규제가 사라지긴 어렵다고 볼 때 수도권과 가까운 곳이 반사이익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사무실을 나오면서 마지막으로 ‘1년 뒤 집값 전망’을 물었다. “오를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작년처럼 값을 특정하지는 않았다.
출처 : 주간조선 최원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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