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에겐 꿈, 의지, 도전 그리고 가정이 있었다
세계 경제대국인 일본에서는 여성 CEO를 찾아보기 힘들다. 기업 여성지도자 인터내셔널(Corporate Women Directors International )이 조사한 세계 200개 국가의 여성 CEO들 수치를 보면 일본이 0.7%로 제일 낮은 결과가 나왔다. 이는 일본 기업문화가 얼마나 보수적인지를 증명해 주고 있다. 하지만 이런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의지' 하나를 무기로 세상이라는 무대에 뛰어든 성공한 캐리어 우먼들이 이목을 끌고 있다.
자동차 영업사원에서 대형 슈퍼체인점 사장으로, '대단한 미숙아'에서 일본 최대 휴대전화 옥션 사장으로 성공하기까지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의 성공신화는 일본 여성들에게 희망이 되고 있다. 그녀들은 그 누구보다 특별한 행운을 누렸다거나, 하루아침에 스타로 탄생한 것도 아니다. 직장 여성이라면 누구나 부닥쳤을 법한 장애물을 이들 역시 겪었다. <이코노믹 리뷰>에서는 일본에서 성공한 여성 CEO들을 만나 이들의 성공스토리를 들어봤다.
◇ 다이에 하야시 후미코 회장
BMW 판매왕서 유통사 사장까지
그녀는 제품 아닌 인간관계를 팔았다
혼다·BMW자동차 판매의 톱 세일즈 우먼으로 활약해 BMW도쿄 사장을 거쳐 현재는 대형 슈퍼체인그룹 다이에의 회장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하야시 후미코(59) 회장. 그녀는 지난해 <월스트리트 저널>이 선정한‘주목받는 세계 여성 경영자 50명’중 아시아인으로는 유일하게 선정된 인물이다.
하야시 회장은 대단한 경력의 소유자로 이미 일본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다. 그녀의 성공은 일반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한 요건들을 갖췄다.
31세에 자동차 세일즈 업계에 뛰어든 그녀는 가정집 100곳을 방문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현장을 누볐다. 그녀의 영업 방침은 차를 파는 것보다 상대방과의 인간관계를 만드는 것에 무게중심을 두었다.
“당시 자동차 업계에서 여성이 세일즈 하는 일은 드문 일이었습니다. 저는 이를 장점으로 살려 여성의 영향력을 발휘했죠. 기계지식이 많은 남성 세일즈맨은 보통 고객들과 만나면 잡담은 하지 않고 차 캐털로그를 보여주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무더운 날 차가운 차는 어떻습니까’ 등 ‘휴식시간에 모처럼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시작해 고객이 개인적으로 관심 있는 부분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고객의 마음을 차례로 풀어나간다고나 할까요.” 하야시 회장은 세일즈 당시의 경험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 같은 방식으로 접근한 그녀의 영업방식은 그대로 실적으로 나타났다. 4년8개월 만에 400대를 팔아 영업소장으로 승진했다. 이후 그녀가 맡은 지점은 대부분이 최우수 지점으로 지정이 될 정도였다. 그녀의 실적은 자동차 세일즈 업계에서 ‘하야시 신드롬’이 생길 정도로 대단했다.
“저는 누군가에게 물건을 판다는 것은 저 자신을 파는 것이라고 봅니다. 때문에 상대방과 마주보며, 사람의 기분을 알아주면 물건은 팔리고 있다고 느낍니다” 그녀만의 세일즈 노하우다.
이어 그녀는 “차가 필요 없는 사람도 인간관계가 쌓여 친해지면, 주위에 차가 필요한 사람이 없나 적극적으로 찾아주기도 해서 보람을 느낄 때가 많았습니다”며 세일즈 하는데 있어 인간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재차 강조했다.
물론 그녀에게도 세일즈를 하면서 우여곡절이 있었다. 특히 그녀가 혼다에 입사하고 20일째 되던 날, 당시 주문서를 제대로 쓸 수 없어 고객 전화를 빌려 영업소에 전화해 작은 소리로 하나하나 물어보고, 15분이면 끝낼 서류를 1시간 30분이나 걸려 작성을 간신히 끝낸 적도 있다. 하야시 회장이 첫 차를 팔았을 때 겪었던 에피소드다.
그녀는 “너무 흥분해 영업소 가는 길을 잊을 정도였다”며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아직도 아찔할 정도라고 회고했다.
하야시 회장은 ‘나는 승부한다’와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그녀는 “‘당신이 중요합니다.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생각하면 기분이 선해진다”며 “기업경영도 세일즈의 성공도 모두 사람에게 감동 받고, 감동을 주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사람들과 감동을 공유하는 게 제 성공 노하우라고 할 수 있죠”라고 말했다.
하야시 회장이 직원 280명에 불과한 BMW의 지점장에서 200여 개 점포망을 지닌 대기업의 최고경영자로 올라간 후에도 제대로 능력을 발휘할 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한 대에 수백만 엔인 고가의 외제 자동차의 판매에는 정통할지 모르지만, 1∼2엔의 가격으로 경쟁하는 슈퍼마켓업계에서 그의 경험이 먹혀들진 의문이라는 것.
다이에에 취임 이후 하야시 회장은 유통업계의 관행 중 하나인 리베이트를 폐지하는 등 과감한 개혁을 추진 중이다. 오는 12월부터는 회사의 새로운 로고와 슬로건을 발표할 예정이다.
그녀는 “사장은 자신의 행선지를 스스로 결정하는 게 중요하다”며 “스스로 그러한 나침반을 가질 수 있는 인간이 되고 싶다”고 다짐한다.
또한 하야시 회장은 “비즈니스의 성공은 팀워크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사장이야말로 구석구석에 눈길이 가야 하고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고 있어야 한다”며 기업의 리더로서 지녀야 할 기본원칙을 설명했다.
실제로 하야시 회장은 요즘 다이에 매장을 구석구석 훑으면서 현장 분위기를 익히느라 여념이 없다. 또한 다이에 5만 명의 사원들을 대상으로 앙케이트 조사를 실시해, 현장의 한사람 한사람에게 그림자의 역할이 되어 격려하는 모습이 주위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도 했다.
그녀는 CEO가 지녀야 할 조건 중 첫째가 '건강’이라고 강조하며 주 2회 정도 수영과 하루 25분 정도 스트레칭 등으로 몸을 푼다고 한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가족들과의 저녁식사시간’이라고 한다.
■ 1946년, 도쿄 태생. 마쓰시다 전기산업, 도요 레이온 등 근무. 77년 혼다 판매점에 입사해 세일즈로 활약. 87년 BMW 입사. 91년 누계 판매 400대 달성. 93년 신주쿠 지점을 최우수 지점으로 키움. 98년 중앙 지점장으로 취임. 재임 중에 스카우트되어 99년 퍼 렌 도쿄주식회사 대표이사 사장 취임. 4년간 총 매출과 판매 대수를 2배로 증가시킴. 2003연 8월 BMW도쿄주식회사 대표이사 사장 취임. 2005년 4월부터 주식회사 다이에 고문. 동년 5월 주식회사 다이에 대표이사 회장 겸 CEO로 취임.
◇ 산요전기 노나카 도모요(野中ともよ) 회장
“실패율 0% 추구하지 말고
성공률 100% 목표로 삼아라”
“지구상에서 환영받는 회사로 만들겠습니다. 산요전기 직원들과 함께 일어설 겁니다."
지난 4월 산요전기의 회장 겸 CEO로 임명된 노나카 도모요(50) 회장은 탄력 있는 CEO로 정평이 나 있다. 노나카 회장은 산요전기에 새로운 젊은 활력을 불어넣어 생동감을 주고 있다. 이로 인해 그녀는 정체돼 있는 산요의 조직문화를 바꿔줄 수 있는 유일한 여성 CEO로 주목을 받고 있다.
산요전기는 세습경영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일본의 대형 종합전기회사다. 니이가타 주에쯔 대지진의 여파와 디지털카메라, 휴대전화 사업의 부진으로 2005년도 1210억엔이라는 사상 최대 적자를 기록하는 등 창업 이후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따라서 일본 재계는 노나카의 CEO 선임소식을 듣고 의외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노나카 회장은 경영과는 무관한 인사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20여 년 간 NHK와 민방의 뉴스캐스터로 활동해 온 저널리스트다.
하지만 노나카 회장은 이에 굴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앞으로의 산요전기를 기대해도 좋습니다”라며 “전기회사 중 ‘지구상에서 가장 환영받는 회사’가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이를 위해 노나카 회장은 “실패율 0%를 목적으로 하는 것과 성공률 100%를 목적으로 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실패가 없으면 성공은 보이지 않습니다. 실패는 성공으로 가는 길에 대한 지혜가 담겨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회사를 살리기 위해서는 사원 한 명 한 명의 능력이 발휘돼, 지금의 산요전기를 어떻게 이끌어 나갈 것인가를 먼저 고민하는 게 중요합니다”라고 말한다.
이어 그녀는 “공장에서부터 임원들의 현장을 둘러보며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은 물론, 우리의 훌륭한 기술을 토대로 ‘사람에게 도움이 돼야 한다’는 신념으로, 산요전기의 DNA 재인식을 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고 그룹의 의사결정에 대한 투명성을 높이면 산요전기는 바뀔 것”이라고 앞으로의 포부를 밝혔다.
그녀는 2001년 닛코 파이낸셜 인텔리전스 이사장을 역임하면서 재계에 발을 들여 놓았다. 이듬해 산요전기 사외이사를 거쳐 아사히 맥주의 사외이사직도 맡았다. 일본 사회에서는 그녀를 일컬어 ‘일본의 피오리나(전 휼렛패커드 회장)’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날 정도다.
산요전기의 한 임원은 “노나카 회장은 정보발신능력, 외부 의견, 다양한 의견을 조율하는 능력이 뛰어나고 정부의 정책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고 기술에 대한 조예가 깊다”고 노나카 회장의 캐리어를 높이 평가했다.
그녀는 어릴적 호기심이 많은 아이였다고 한다. “도쿄에서 1960∼1970년대 고속도로가 생기고, 올림픽이 개최되고, 일본형의 경제 성장과 부합하는 시대에 학창시절을 보내며, 현재와 미래가 어떻게 될지, 격렬하게 변화하는 사회는 도대체 어디로 향해 움직이는지, 항상 의문을 갖고 사물을 응시하며 청춘을 보냈죠.”라고 과거를 회상했다.
이어 그녀는 “그리스 신화도 좋아하고, 클래식부터 하드록까지 음악은 다 좋아합니다. 특히 무엇인가를 아는 것을 좋아합니다. 다양한 정보를 알면 재미있어요. 정보를 얻기 위해 사람과 대화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한 명의 표정을 좌우로 살피고 또 다른 각도로도 생각해 보고, 상대방의 정보가 어디서 전해졌는지, 어떻게 전달된 것인지, 자신이 어떤 입장이었는지 생각합니다. 물론 그 사람을 먼저 신뢰합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저널리스트 출신임을 그대로 드러내는 발언이 아닐 수 없다.
NHK 재직 당시 그녀는 유창한 영어 실력을 과시하며 영국 찰스 황태자와 다이애나 황태자비의 로열 웨딩을 BBC(영국 방송)으로부터 생중계 하는 중임을 맡기도 했다. 이 외에 경제·주식·금융 등 비즈니스 관련 분야를 맡아 전문지식과 인적 인프라를 넓혀왔다. 한편 취임 6개월이 지난 현재 일본 정부는 노나카 회장의 등장을 반기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일본 정부는 “노나카 회장과 같은 여성지도자가 늘어나길 기대한다”고 말해 일본 정부와 재계의 여성관에 큰 변화가 일고 있음을 시사했다.
■ 1977년 조오치 대학교 문학부 신문학과 졸업, 동 대학 학원 문학 연구과 박사 전기 과정 수료(유학 휴학을 거쳐 '94해 수료). 77년 미국 컬럼비아 대학 대학원 유학. 79년 일본 방송협회(NHK)에서 ‘해외 위클리’‘선데이 스포츠 스페셜’등 프로그램 캐스터를 맡음. 1981년 영국 로열 웨딩 현지 메인 캐스터. 1987년 중경여자대학 각임 교수. 1992년 텔레비전 도쿄 계열 ‘월드 비지니스 새틀라이트’메인 캐스터. 2002년 3월 아사히 맥주 주식회사 이사 . 2002년 6월 산요전기 주식회사 이사. 2004년 6월 주식회사 닛폰방송 이사. 05연 6월 산요전기 주식회사 대표이사 회장 겸 CEO .
◇ 데나(De·NA) 남바 토모코(南場智子)사장
“여성의 응석은 그때 뿐…
2배 노력해야 성공한다”
“여성이 응석을 부리면 여러 가지로 이득을 본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기적인 현상일 뿐입니다. 본인의 실력이라고 착각해 버리는 것은 큰 실수입니다. 본인의 성장이 늦어지는 지름길이죠. 중장기적으로 세상에서 보여지고 있는 것보다 2배는 노력해야 여성으로 성공할 수 있습니다”
데나의 남바 토모코 사장(43)은 1999년 회사를 설립해 현재 Web 코머스 사업(옥션&쇼핑&핸드폰 사이트), 모바일 사업(휴대전화 전용 옥션 사이트&게임), 솔루션 사업(EC에 관한 솔루션 서비스를 제공) 등을 하고 있다. 특히 지난 2004년 오픈한 휴대전화 옥션 사이트 ‘모바오크’가 최대 회원수를 자랑하며 유료화에 성공해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 그녀는 회사를 창사 6년 만에 주식시장에 상장해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기도 했다.
남바 사장은 "대학 졸업 후 경영 컨설턴트 회사인 맥킨지에 취직했습니다. 제가 맡은 최초의 프로젝트는 ‘일본 모기지 금융증권화의 시장성’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아는 단어는 ‘일본’뿐. 당시 저는 아무 것도 모르는 채 2년을 보내고, 결국 미국으로 도망쳤습니다. 그러다 다시 귀국했죠. 다시 맥킨지에 입사했지만 왠지 이것으로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그때 ‘이것이 마지막이다’라는 마음을 먹고 스스로 가치를 제공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만들었습니다. 결과는 대성공으로 클라이언트를 기쁘게 했죠”라며 컨설턴트로 활동하던 때의 이야기를 했다.
그 후 1999년 회사를 설립하기 위해 남바 사장은 일이 끝나는 한밤중과 주말엔 사업 플랜을 만들었다. 같은 해 그녀는 데나(De·NA)라는 회사를 설립한다. 하지만 사업 초창기 그녀에게 어려움이 닥쳐왔다. “시스템 사기를 당해 새벽 4시에 귀가해 자고 있는 남편을 깨워 얘기를 했더니, 남편은 ‘천재가 3명 있으면 한 달 안에 해결할 수 있다. 그리고 관계자에게 일부러 숨기지 말아라. 사기라는 말은 사람 탓만 하는 것뿐이다. 경영자로 실격이야’ 라는 말에 힘을 얻어 아침 7시에 관계자 등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결국 주위의 도움으로 해결할 수 있었고 저는 ‘대단한 미숙아’라는 별명을 얻게 됐죠.”
그녀는 컨설턴트와 경영자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했다. 컨설턴트는 전략·사업 모델 등을 논리적으로 올바르게 이끌어내는 것인 반면 경영은 100% 실행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어 남바 사장은 “예전에 택시만 탔던 제가 요즘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열차 광고나 다양한 볼거리를 즐깁니다. 쇼핑을 좋아해 경제적으로 사치를 부렸는데 시간이 없는 탓인지 옷도 10년 전 그대로입니다”고 말했다. CEO가 되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얘기다.
한편 남바 사장은 “나의 꿈은 무엇보다 사회에서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 회사로 성장하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 1986년 맥킨지 입사. 1988년 맥킨지를 퇴직, 하버드 대학 입학. 1990년 하버드 대학에서 MBA 취득, 그 후 맥킨지에 복직. 1996년 역대 일본인 여성으로 3명째의 맥킨지 파트너(임원)로 취임. 1999년 맥킨지 퇴직, 주식회사 De·NA를 설립.
레퀴오파마 오쿠 기누코 (奧キヌ子 )사장
“‘여자이니까…’포기하면 끝
전진하면 아마추어도 꿈☆ 실현”
“어떠한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이나 대책을 강구합니다. 그러다 문제가 해결되면 굉장히 즐겁습니다. 세상에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의약품 전문 개발회사인 레퀴오파마의 오쿠 키누코(58) 사장의 말이다. 오쿠 사장은 15년 간 절제 수술을 필요로 하지 않는 치질 치료제 개발에 성공해 ‘일본 벤처 월드’ 수상 등 상을 휩쓸며 일본에서 떠오르는 여성 CEO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신약 개발은 성공률이 몇 만분의 1로 좁은 관문을 뚫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그만큼의 가치가 있었습니다”고 말하는 그녀는 전후 세대다. 어릴 적부터 가슴 한 곳에 ‘오키나와에 산업을 일으키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기업가 정신을 키웠다는 오쿠 사장은 한 번 한 말에 대해서는 책임을 갖고 전진하는 스타일이다.
“중국에서 선배가 갖고 온 치질약이 계기가 돼 1991년 회사를 설립하게 됐습니다. 느낌이 왔죠. 그리고 고민 끝에 수술보다 몸에 부담이 없는, 투약에 의한 치료를 원하는 환자가 많을 것이라는 확신 하나만으로, 전문가에게 의견을 청해 연구에 몰두 했습니다. 저는 스스로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편입니다. 싫증이 날 때도, 주위의 많은 것들을 잃어가도 포기하지 않고 저의 연구는 계속되었습니다.”
오쿠 사장의 이런 노력 덕분에 레퀴오파마는 일본 신약 시장에서 제1의 제약 벤처 회사로 급부상하며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지난달 한국의 대표적 제약사인 유한양행과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한국에 있는 여성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마추어라도 꿈을 포기하지 않고 전진하면 실현된다고요. 특히 용기를 갖고 진행시킨다면 일은 성사되지요. 제 다음 목표는 기업의 인지도를 높여 다음 신약 개발에 착수하는 것입니다. 또한 저는 언젠가 오키나와에 제약공장을 세울 겁니다. 제 인생에 포기란 없습니다.”
■ 1946년생. 오키나와현 이토만시 태생. 1971년 류큐 대학 농가정 공학부 졸업. 1075년 무역회사 경영, 1991년 제약 기구 설립(전무이사). 1994년 사장으로 취임 , 1995년 미츠비시 웨르파마 공동 개발 개시. 2000년 레키오파마로 회사명 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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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키코포레이션 아키야마 사키 메구미(秋山·惠) 사장
“진로 바꾸고 싶을 때 과감히 도전한 게 성공비결”
사키코포레이션의 아키야마 사키메구미(43) 사장은 1994년 15평 크기에 오피스텔과 자본금 300만엔으로 벤처 회사를 설립해, 현재 연 13억엔에 달하는 매출을 올리는 거대기업의 CEO로 우뚝 섰다.
도쿄의 번화가인 신주쿠 역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인 빌딩 31층에 위치한 사키코포레이션 사무실에서는 도쿄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곳에서 아키야마 사장은 이동전화 반도체 등 각종 전자제품의 생산에 반드시 필요한 기기의 연구 개발에 몰두하고 있다.
“어린 시절에는 문학을 좋아하는 우등생이였죠. 때문에 미래에도 문학과 관련된 일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대학 때 제 꿈은 바뀌었습니다. 보봐르의 《제2의 성》 등을 읽다 ‘두려워하지 말고 사회에서 여러 가지 가능성을 시험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돼 진로를 법대로 바꿨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대학 졸업이 2년 늦어진 아키야마 사장은 ‘프로페셔널을 목표로 한다’는 다짐을 하며 컨설턴트 회사에 들어가 일에 전념했다. “스스로 자진해서 오사카에서 도쿄로 갔습니다. 오사카 대기업에서 근무하는 남편과 별거생활을 해야 했지만요”라며 의욕이 넘쳐났던 그녀의 사회 초년시기 때 상황을 회고했다.
그러던 중 지난 1994년 그녀는 또 한 번의 진로변경을 모색하게 된다. “회사를 다니던 중 ‘이대로 좋은가’라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좀 더 사회와 부딪쳐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져 벤처회사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저와 남편은 연구소 기술자도 아니었고, 어떤 사업을 할지 한참 구상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다 생각한 것이 검사 장치입니다. 좋은 제품이 만들어지면 영업을 확장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죠.”
아키야마 사장은 처음 15평 오피스텔은 기업 지원금을 받기 위해 제3섹터가 운영하는 인큐베이션 시설에서 빌렸다. 이 사무실에서 그녀의 남편은 검사시간을 큰 폭으로 단축하는 획기적인 제품을 개발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지명도가 없어 대기업에 밀려나는 것은 물론 타 기업에 기술을 빼앗기기도 했다. 때문에 아키야마 사장은 ‘무엇 때문에 이 일을 하는가’라고 단념도 했지만, 생각을 바꿔 ‘스스로 이 회사가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관찰하면서 다이렉트로 문제를 풀어나갔다. 개발·제조·영업을 분리해 다른 기업에 기술을 빼앗기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그녀는 당시를 회고하면서 “기술은 흉내 낼 수 있지만, 기술의 흉내로 최고의 회사를 만들 수 없다는 경영 신념을 갖고 앞으로 전진했다”고 말했다. 결과는 대 성공이었다. 사키코포레이션은 검사장비를 대규모 제조업체인 소니·캐논·샤프·도시바 등을 비롯해 한국 기업인 삼성에도 납품하게 된 것이다. 아키야마 사장은 ‘한 걸음 한 걸음 경험을 쌓을 수밖에 없다’는 신념으로 오늘에 이르렀다. “경험이 없으니까, 여자이니까라고 주저해봤자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습니다. 누구보다 자신의 가능성을 믿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네요.”
한편 그녀는 “아무리 바빠도 문화생활을 반드시 즐긴다”고 말했다. 문화생활은 감각을 유지시켜주고 시야도 넓혀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 안다센·컨설팅(現액센츄어)을 거쳐 창업/교토 대학 법학부 졸업/정부 세제(稅制) 조사회(코이즈미 수상의 자문기관) 위원/일본신 사업 지원 기관 협의회(JANBO/회장:에사키 레오나 박사)펠로/중소기업 대학교 강사 , 가와사키시 재무 행정 시스템 개혁 간담회 위원/가나가와 산업 정책 간담회 위원, 그외 인큐베이션 관련 기관에서의 강연 다수
채현주 기자(chj@ermedia.net)
출처 : 이코노믹리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