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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다시 리더를 말한다 ⑫롯데그룹 신격호 회장2007-07-20
작성자상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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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단 가출 → 해외서 성공 → 고국 유턴
그는 현대판 장보고였다
혈혈단신으로 현해탄을 건너가 한·일 양국에서 거대 기업을 일군 신격호 회장. 미수(米壽)를 바라보는 나이에도‘관광입국’구상에 힘을 쏟고 있는데…. 현대판 장보고로 비유되는 그의 사업적 리더십은 무엇일까.

그의 좌우명 ‘거화취실(去華就實)’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을 배제하고 내실을 지향한다’는 뜻으로 그의 모교인 와세다대의 교훈이기도 하다.

신격호와 장보고. 한 사람은 무예로 전쟁터에서, 또 한 사람은 아이디어로 상전(商戰)에서 승리했고, 두 사람 모두 해외에서 쌓은 기반을 바탕으로 모국에 들어와 세계인으로 대성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신격호 회장은 일본을 거점으로 하여 한·일 양국에서 기업을 일으켜 대성공을 거둔 사람이다. 그 역시 다른 창업자들과 마찬가지로 적수공권(赤手空拳)에서 출발해 오늘날의 롯데그룹을 이뤘다. 그의 성공 신화가 많은 젊은이들의 탐구 대상이 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신 회장은 1922년 경북 울주군 삼남면 둔기리에서 부친 신진수의 5남5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이 지역은 현재 대암댐이 건설되면서 수몰된 곳이다. 단돈 80엔을 들고 일본으로 밀항해 마침내 롯데그룹을 건설한 그로서는 물속에 잠긴 고향에 대한 애착이 남보다 훨씬 강했을 것이다. 그가 수몰된 고향 주민들과 후손들을 찾아내 ‘둔기회’를 만든 뒤 매년 대암댐 인근에 있는 자신의 별장에서 ‘귀향잔치’를 베푸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둔기회’의 귀향잔치는 지난 1971년부터 지금까지 근 40년 가까이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40년 간 계속된 ‘둔기회’귀향잔치

일찍이 한고조 유방(劉邦)은 기원전 195년에 천하를 평정한 뒤 돌아오는 길에 고향인 패현(沛縣)을 지나던 중 행궁(行宮)을 세우고 고향사람들을 위해 큰 잔치를 베풀었다. 유방은 주흥(酒興)을 이기지 못해 벌떡 일어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던 중 갑자기 옛날 일이 생각나 눈물을 흘리며 이같이 말했다.

“객지를 떠돌던 사람이 고향을 돌아보니 감회가 새롭소. 짐은 맨손에서 시작해 포악한 역도들을 제거하고 끝내 천하를 차지하게 되었소. 패현은 짐의 탕목읍(湯沐邑: 부세(賦稅)를 정부에 납부하지 않는 봉읍)이니 그 백성들에게 세세토록 부역을 면제해줄 것이오.”‘금의환향(錦衣還鄕)’고사는 바로 여기서 나온 것이다.

신 회장이 어렸을 때 그의 집안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그는 면장을 지낸 백부의 도움으로 간신히 2년제 농업보습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보습학교를 졸업한 뒤 백두산 밑에 있는‘명천국립종양장’의 연수생으로 1년 동안 있었다. 이때 그는 이웃 마을 부농의 딸인 노순화 씨와 결혼했다.

그러나 그는 직장인 경남 도립 종축장 부근에서 혼자 하숙을 했다. 이때 그는 처자식을 떼어놓은 채 일본으로 밀항할 생각을 품었다. 결국 그는 1941년에 혈혈단신 맨주먹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후 부인 노씨는 현재 롯데백화점 부사장으로 있는 어린 딸과 함께 생활하면서 남편의 귀국을 학수고대하던 중 이내 병사하고 말았다. 훗날 그는 당시의 심경을 이같이 술회했다.

“정말 살기가 어려웠습니다. 일본에 건너가 성공하고 싶었습니다. 부친이 반대할 것 같아 몰래 빠져 나왔습니다.”

당시는 태평양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었던 까닭에 밀항자 신분이었던 그는 일본 형사의 가혹한 고문을 받아야만 했다. ‘조센진’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 그가 지금까지 한국인임을 잊지 않고 한국 국적을 고집스럽게 유지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당시 그는 도쿄의 스기나미구(衫竝區) 코엔지(高圓寺) 거리의 8장짜리 다다미방 하나를 빌려 자취를 하고 있던 고향 친구를 찾아갔다. 여장을 푼 그는 곧바로 생활비를 벌기 위해 우유배달을 시작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새벽의 정해진 시간에 우유를 어김없이 배달하자 그의 성실성에 탄복한 주민들의 배달주문이 폭주했다. 덕분에 반년 가량 지난 뒤 1평 반짜리 방 하나를 얻어 독립할 수 있었다. 이때 그는 대학 진학을 위해 와세다 중학 야간부에 입학했다.

우유배달로 학업 꿈 가꿔간 문학지망생

당시 그는 문학 지망생이었다. 그러나 그는 도중에 사업가로 진로를 바꿨다. 돈을 속히 벌어 ‘금의환향’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때 문학지망을 위해 열심히 했던 독서가 사업가로의 변신에 큰 도움이 되었다. 실제로 1948년 6월에 출현한 주식회사 ‘롯데’의 상호는 그가 젊었을 때 감명 깊게 읽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여주인공 ‘샤롯데’에서 따온 것이다. 훗날 그는 당시의 감격을 이같이 술회한 바 있다.

“내가 회사 이름을 롯데로 선택한 것은 내 일생의 최대 수확이자 걸작의 아이디어였다.”

지금도 책 속에 모든 정보가 있다는 게 그의 확고한 생각이다. 당시 그는 주경야독(晝耕夜讀)하는 근면한 자세로 학업에 임해 마침내 현재의 와세다대 이학부인 와세다 고공(高工) 야간부 화학과를 졸업했다. 그가 화학과를 지망한 것은 비록 전시 중이기는 했으나 이공계 학생은 징집을 당하지 않은 사실과 무관치 않았을 것이다.

일본의 패색이 짙어갈 무렵 평소 그를 눈여겨보던 전당포 겸 고물상 주인 하나미쯔(花光)라는 60내 남자가 그를 찾아와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군수용 선반 오일이 품귀상태이다. 자네가 공장을 차려 제조해 보겠다면 5만엔을 출자할 용의가 있다. 수요처는 내가 주선해 주겠다.”

그러나 사업이 한창 잘 풀리는 와중에 불행히도 공장은 연합군 폭격기의 폭격으로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빚 6만엔을 갚을 길이 묘연해진 그는 크게 낙담했다. 무엇보다 자신을 알아 준 사람에게 신용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에 그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다시 심기일전(心機一轉)해 종전 이듬해인 1946년 5월에 비누와 포마드를 제조하는 히카리(光) 특수화학연구소를 설립했다. 물품이 크게 달리던 시절이라 그는 곧 거금을 손에 거머쥘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맨 처음 한 일은 바로 하나미쯔에게서 빌린 돈을 갚는 일이었다. 훗날 그는 당시의 심경을 이같이 회고했다.

“빚 6만엔을 모두 갚고 그 이자로 하나미쓰 노인에게 집 한 채를 사드렸다. 당시 나는 사업을 한다기보다는 어떻게든 돈을 빨리 벌어 보답하겠다는 마음뿐이었다.”

지은(知恩)에 보답하기 위해 헌신하는 타고난 성실성이 약여하게 드러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가 화장품으로 돈을 벌자 하루는 친구가 찾아와 껌을 제조해 볼 것을 권유했다. 당시 일본에는 소규모 껌 공장이 난립해 있었다. 그는 좋은 원료를 구입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린 뒤 껌 사업에 뛰어들었다. 대성공이었다. 오늘의 롯데는 바로 껌 산업에서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밀항한 지 10년째가 되는 1950년에 한국전쟁이 터지자 껌이 날개 돋친 듯이 팔려 나갔다. 이 와중에 그는 자신이 세 들어 사는 집 주인의 딸 다케모리 하츠코(竹森初子)와 결혼했다. 하츠코의 모친은 중국 상하이 홍구(虹口) 공원에서 윤봉길 의사의 폭탄 투척으로 중상을 입은 주중 일본공사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의 딸이었다. 1945년 9월에 미국 전함 미주리호에서 거행된 항복 문서 조인식 때 일왕 히로히토와 함께 정부 대표 자격으로 목발을 짚고 참석한 외상이 바로 시게미쓰였다. 그가 일본에서 성공한 데에는 이런 혼맥(婚脈)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실제로 신 회장의 일본이름은 시게미쓰 다케오(重光武雄)이다.


사업 확장할 때마다 미인 적극 활용

신 회장의 성공 신화와 관련해 주목할 점은 롯데가 사업을 확장할 때마다 미인을 적극 활용한 점이다. 지난 1957년에 지금의 일본 천황부부인 아키히토와 쇼다 미치코의 결혼식이 컬러TV로 생중계 될 당시 일본 국민들은 이를 보기 위해 너도나도 컬러TV를 구매했다. 그는 이를 놓치지 않고 융단폭격식의 광고전을 전개했다. 그는 간부들에게 이같이 말했다.

“컬러TV의 프로그램을 몽땅 사들여라. 그리고 ‘그린껌’을 선전하라.”

그의 지시에 따라 천문학적인 비용을 컬러TV 광고에 쏟아 부었다. ‘미스롯데 선발대회’가 열리고 ‘롯데 가요 앨범’이라는 프로그램이 만들어졌다. 이런 이벤트가 ‘그린껌’과 함께 일본 열도를 열광케 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롯데는 한국에 진출할 때에도 동일한 수법을 구사했다. 심리학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미녀는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기도 하지만 도와주고 싶은 마음도 이끌어 낸다고 한다. 신 회장은 일찍부터 이런 사실을 통찰한 셈이다.

그러나 이는 전혀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동양에서는 이미 기원전부터 미인의 위력을 실감하고 있었다. 미인계(美人計)가 그 증거이다. 미인계의 대표적인 사례로 《삼국연의》에 나오는 유비와 손권 여동생의 정략결혼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역사상 이보다 더 유명한 사례로는 춘추시대 말기에 월왕 구천(句踐)이 구사한 미인계를 들 수 있다.

《오월춘추(吳越春秋)》에 따르면 당시 월왕 구천은 오왕 부차(夫差)의 교만을 부추기기 위해 미인계를 구사했다. 그의 미인계에 동원된 미희는 무수한 전설을 남긴 서시(西施)와 정단(鄭旦)이었다. 당시 서시와 정단은 도성에 머물며 3년 동안 노래와 춤, 화장하는 법, 걸음 걷는 법 등을 배운 뒤 오왕 부차에게 헌상되었다. 모신(謀臣) 범리가 그녀들을 이끌고 오나라로 가 부차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천신(賤臣) 월왕 구천이 저를 시켜 두 여인을 대왕에게 바치게 했습니다. 만일 대왕이 두 여인을 추하다고 여기지만 않는다면 부디 거두어 기추지용(청소하는 데 사용한다는 뜻으로 처첩을 의미)으로 쓰기 바랍니다.”

오왕 부차는 두 여인을 보고 그만 넋이 나가고 말았다. 이때 곁에 있던 오자서(伍子胥)가 간했다.

“대왕은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제가 듣건대 ‘현사는 나라의 보물이나, 미녀는 나라의 재난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라의 걸(桀)은 말희로 인해 망했고, 상왕조의 주(紂)는 달기로 인해 망했고, 주유왕(周幽王)은 포사로 인해 망했습니다.”

그러나 오왕은 이를 듣지 않고 월나라 미녀들을 받아들였다. 결국 오나라는 월왕 구천이 구사한 미인계에 빠져 서서히 몰락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서시와 관련된 일화는 《장자》‘천운(天運)’에도 나온다.

“서시는 가슴앓이 병이 있어 자기 마을에서 언제나 눈썹을 찡그리고 있었다. 마침 같은 마을의 한 추녀가 이를 보고 그 아름다움에 감탄한 나머지 곧 가슴에 손을 얹고 눈썹을 찡그리며 마을을 돌아다녔다. 그러자 마을의 부자들은 이를 차마 볼 수가 없어 대문을 굳게 잠그고 나오지 않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처자를 이끌고 도망쳐 버렸다.”

이 일로 인해 마을의 추녀는 ‘서시’와 대비되는 ‘동시(東施)’라는 자못 명예롭지 못한 호칭까지 얻게 되었다. 여기서 바로 그 유명한 ‘효빈(찡그림을 흉내 냄)’이라는 성어가 나왔다. ‘효빈’은 훗날 내막도 모르고 무조건 흉내 내는 몰지각한 자들을 지칭하는 말로 전용되었다. 이는 염량(炎凉)세태에 대한 통렬한 비난을 담고 있는 것이다.

사실 큰 틀에서 보면 ‘미스 롯데’는 롯데의 사세를 비약적으로 키우기 위해 신 회장이 전략적으로 선발한 현대판 서시와 정단에 해당한다.

신 회장이 오늘의 롯데그룹을 이룩하게 된 배경에는 ‘미인계’ 이외에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탁월한 부동산 투자가 크게 작용했다. 이는 잠실 롯데월드를 비롯해 롯데호텔과 백화점 등이 모두 노른자위 땅 위에 서 있는 사실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실제로 그는 젊은 시절 껌과 과자를 팔아 모은 돈으로 도쿄 변두리 땅을 야금야금 사들인 바 있다. 지금은 도쿄의 번화가로 변해버린 신주쿠(新宿)와 도쿄 롯데 월드가 들어서 있는 캇사이(葛西) 지구, 도쿄만 입구의 요지인 우라와(浦和) 일대는 원래 황폐한 땅이거나 저습지였다. 당시 일본 사람들은 부동산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 때 그는 한국전쟁의 특수경기 속에서 번 돈을 모두 이런 버려진 땅을 사는 데 투자했다. 1960대에 들어와 일본이 고도성장기로 접어들자 도쿄의 시가지가 변두리까지 확대되었다. 그의 땅이 신시가지의 중심부가 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현재 그는 미수(米壽: 88세)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젊은이 못지 않은 체력으로 한일 2개 그룹을 이끌고 있다. 이는 건강하지 못하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의 건강 비결은 일반인들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부지런함에 있다. 그는 잠시도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다. 실제로 그는 촌음을 아껴 쓰며 사업에 모든 정성을 쏟아 붓고 있다. 이는 그의 좌우명(座右銘)이 ‘거화취실(去華就實)’인 사실과 무관치 않다.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을 배제하고 내실을 지향한다는 뜻이다. 이는 그의 모교인 와세다대의 교훈이기도 하다.


탁월한 부동산 투자도 그룹 확장에 기여

그는 아이디어맨이기도 하다. 그의 성공은 합리적 경영과 남보다 앞선 국제적인 아이디어의 소산이기도 하다. 그는 자주 신라 말기에 청해진(淸海鎭: 현 완도)을 배경으로 해상왕국을 세운 장보고(張保皐)에 비유된다. 장보고는 일찍이 해로의 요충지인 완도에 진을 설치해 해적을 완전 소탕한 뒤 제해권을 장악한 인물이다. 당시 그는 일본에 무역사절을 보내고, 당나라에 소위 견당매물사(遣唐賣物使)를 보내는 삼각무역을 통해 거만금을 모은 바 있다.

동아시아 바다를 배경으로 해상왕국을 세운 장보고는 세계경영이 화두로 등장한 현대의 관점에서 볼 때 본받아야 할 점이 매우 많다. 그의 글로벌 마인드와 네트워크 활용은 현대의 경영인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으로 손꼽히는 것이기도 하다. 일찍이 작가 정순태는 《신격호의 비밀》에서 신 회장과 장보고 리더십의 유사점을 이같이 정리한 바 있다.

“신격호와 장보고는 잇단 흉년 속에서 신분 상승의 야망을 품고 20세 안팎의 나이에 무단 가출하여 중국 혹은 일본 땅에서 사생결단의 승부를 걸었다. 한 사람은 탁월한 무예로 전쟁터에서, 또 한사람은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상전(商戰)에서 승리했다. 두 사람 모두 해외에서 쌓은 기반을 바탕으로 모국에 유턴하여 세계인으로 대성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는 신 회장의 경영 이념이 ‘기업보국’인 사실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는 이름을 바꿔 일본인으로 행세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부했다. 이는 돈을 벌어 모국의 발전을 기여하겠다는 신념이 있기에 가능했다. 실제로 그는 1965년의 한일 국교정상화를 계기로 모국 투자의 길이 열리자 많은 외화를 국내에 투입해 한국의 식품과 관광, 유통산업을 한 단계 높이는 견인차의 역할을 수행했다.

난관에 부딪친 ‘관광입국’프로젝트

최근 롯데는 일본 JBT와 제휴한 ‘롯데JBT’ 합작사를 만들었다. JTB는 무려 1백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일본 최대의 여행사이다. 이 회사는 한 해 평균 1억명 이상의 관광객을 해외로 송출해 연 매출액이 1조3000억엔에 달하고 있다. 이번 여행업 진출은 그간 신 회장이 추진한 관광입국(觀光立國) 구상의 화룡점정(畵龍點睛)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의 이런 구상이 제대로 이뤄질지는 미지수이다. 최근 112층의 555m짜리 초고층 빌딩 숲으로 이뤄진 제2롯데월드 건설안이 항공안전 문제 등의 이유로 반려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가 구상하는 관광입국의 플랜은 최근 그가 고향인 울산에 조성코자 했던 골프장 건설 계획안이 상수원 보호 문제로 무산된 데서 알 수 있듯이 적잖은 난관에 봉착해 있다.

그간 신 회장이 한일수교 이래 양국의 수많은 유력자들과 맺은 긴밀한 인간관계를 토대로 전국 각지의 노른자위 땅에 초호화 건물을 세워가며 사세를 확장시켜 온 점에 비춰 이는 일종의 적신호에 해당한다. 롯데그룹은 이제 신 회장이 후년이면 미수(米壽)에 이르는 점 등을 감안할 때 2세 경영문제와 관련해 커다란 전환점에 서 있는 셈이다. 그에게는 하츠코와의 사이에서 얻은 동주와 동빈이라는 두 아들이 있다. 두 사람 모두 50대 초반이다. 롯데의 미국지사장을 지낸 장남은 일본 롯데의 실질적 후계자이고, 차남은 한국 롯데그룹의 부회장으로 있다. 현재 후계구도와 관련해 많은 사람들이 여러 전망을 내놓고 있으나 신 회장의 속셈은 아무도 모른다. 두 아들 중 한 사람에게 양국의 롯데그룹을 통합시켜 넘겨줄지도 모를 일이다. 신 회장 사후의 롯데그룹 운명은 후계 구도의 정착 여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동준 고전 연구가

출처 : 이코노믹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