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수부인=미술관장”틀깨고
호텔내부.명품관 진두지휘
예술통한 창조마케팅 앞장
요즘 재계 3세는 ‘현대미술’에 푹 빠져 있다. 미술을 모르고서는 국제무대에서는 물론 국내서도 행세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 ‘재벌총수 부인=미술관 관장’이란 등식이 있었다면 요즘 재계 3세와 그 부인은 미술사업을 ‘필수항목’으로 여기며 보다 전략적?체계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아트가 미래 기업경영의 핵심 화두가 되고 있는데다 디자인과 마케팅의 뿌리도 아트이다 보니 소홀히 할 수 없는 것. 이에 따라 재계 3세는 요즘 ‘남다른 아트 마케팅과 미술사업’을 펼치기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
특히 어렸을 때부터 뉴욕?런던 등 문화도시에서 유학한 이가 많아지면서 과거 ‘안주인의 품격’을 살짝 높여주는 데 초점이 맞춰졌던 미술사업은 양상이 크게 달라졌다. 참신하고 수준 높은 현대미술을 남보다 먼저, 더 효과적으로 선보이기 위해 가히 ‘문화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
이건희 삼성 회장의 장녀인 이부진 신라호텔 상무는 수백억원의 예산을 투입해 지난해 마무리한 신라호텔 리모델링 사업을 진두지휘했는가 하면, 호텔 곳곳의 일급 예술작품 설치의 큰 가닥도 잡았다. 물론 삼성문화재단 관계자 등 미술전문가가 나서기는 했지만 로비 등 호텔 핵심 장소의 예술품은 이 상무가 직접 챙겼다고 한다. 이로써 신라호텔은 호텔 내외부가 초특급 작품(피카소 작품도 걸렸다)이 내뿜는 아우라로 ‘미술관과 진배없다’는 평을 받고 있다.
신세계에서도 3세의 활약이 눈부시다. 이명희 회장의 딸인 정유경 조선호텔 상무는 최근 신세계 본점 명품관의 ‘아트 및 디자인 부문’을 총괄하며 바쁘게 뛰었다. 미국 로드아일랜드 디자인학교를 졸업한 정 상무는 개관 기념으로 이탈리아 여성 작가 바네사 비크로프트의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유치하고 백화점 곳곳의 아트워크 프로젝트를 주도해 화제를 모았다. 이처럼 범 삼성가의 ‘3대를 잇는 미술에 대한 열정(이병철→이건희+홍라희→이부진 정유경)’은 다른 기업을 크게 자극하고 있다.
롯데가 3세로 롯데 ‘에비뉴엘’의 명품사업을 총괄해온 장선윤 롯데쇼핑 상무(신격호 회장의 외손녀)도 아트에 관심이 큰 편. 에비뉴엘 9층에 대형 갤러리를 꾸미고 이색 전시를 열게 하는가 하면, 층마다 아티스트의 작품을 수시로 바꿔 거는 등 명품관에 격조를 더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이들 3세가 전면에 등장함으로써 1995년부터 삼성미술관 리움을 총괄하고 있는 홍라의 관장과 경주 선재미술관 및 소격동 아트선재센터를 이끄는 정희자 관장(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부인), 신문로 쌍용미술관 관장으로 있는 박문순 여사(김석원 전 쌍용그룹 회장 부인), 사간동 금호미술관 박강자 관장(금호아시아나 박성용 회장 동생) 등의 뒤를 이어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재계 2세 중에서도 미술사업에 관여하는 이도 많다. 시어머니 박계희 여사가 갑자기 타계하는 바람에 미술관을 맡은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부인 노소영 씨는 2000년 아트센터나비를 출범시키며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미디어아트를 콘셉트로 잡아 화제를 모았다. 노 관장은 SK텔레콤 사옥의 세련된 아트프로젝트도 직접 챙기는 등 차별화된 미술사업을 전개 중이다.
한솔그룹도 미술문화사업에 팔을 걷어붙였다. 한솔 이인희 고문은 며느리 안영주 씨(조동길 회장 부인)와 함께 원주 한솔오크밸리에 미술관과 종이박물관을 짓고 있다. 일본 출신의 세계적 건축가 안도 다다오(65)가 설계 중인 이 미술관에는 이 고문이 30여년간 소장해온 작품이 망라된다.
애경그룹 2세인 채형석 부회장(장영신 회장의 장남)의 부인 홍미경 씨의 활약도 주목된다. 홍씨는 지난 5월 서울 삼청동에 몽인아트센터를 개관하고 애경 미술사업의 기치를 들어올렸다. 미국 보스턴대에서 미술(금속공예)을 전공한 홍씨는 “어머니와 남편 채 부회장이 전폭적으로 지원해 작지만 흥미로운 미술관을 선보이게 됐다”며 “요즘 삼청동이 문화벨트로 급부상해 대중의 호응이 기대 이상”이라고 밝혔다.
그런가 하면 김우중 전 회장의 장녀인 김선정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김준성 이수그룹 명예회장 며느리)는 국제무대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전시기획자로 정평이 나 있다. 김 교수는 또 재계 2, 3세와 코드가 잘 맞아 자문역도 자임하고 있다.
김 교수와 친분이 두터운 ‘대림산업 3세’ 이해욱 부사장(39?이준용 명예회장의 장남)도 미술문화에 관심이 많다. 미 컬럼비아대에서 경영학석사를 마친 이 부사장은 통의동 대림미술관 운영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김 교수는 “미술관 관장은 어머니(한경진 여사)지만 미술관 일이라면 이 부사장이 신바람을 내며 달려온다”고 귀띔했다.
이 밖에 코리아나화장품 2세인 유승희 부관장(유상옥 회장의 딸)은 강남구 신사동에서 코리아나미술관과 화장박물관을 운영 중이며, 한국베링거잉겔하임 창업주인 한광호 명예회장의 셋째딸 한혜주 씨도 부친이 수집한 티베트 미술 수천점을 바탕으로 건립된 평창동 화정박물관의 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처럼 기업의 미술사업은 기업 내부에 창조적 영감을 불어넣고, 미래 동력산업인 문화콘텐츠 산업의 전진기지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재계 3세의 참여는 더욱 확대될 전망이다. 문화경쟁력을 갖춘 기업이 ‘진짜 강자’로 부상하는 시대임을 재계 3세는 이미 간파하고 있는 셈이다.
출처 : 헤럴드경제<이영란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