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FTA 계기로 협상학 열풍, 서적 판매 급증·대학가 강좌 인기
막바지 48시간 연장이라는 초강수로 찬반 진영은 물론 온 국민들의 관심을 끌었던 한·미FTA 협상. 협상이 타결된 이후 곳곳에서 ‘협상학’ 바람이 불고 있다. 협상 관련 서적의 폭발적인 판매 증가와 함께 관련 교육단체에도 수강생이 몰리고 있는 것.
한·미FTA 협상이 시작되면서 매장 한켠에 ‘협상’ 관련 코너를 마련했던 교보문고 등 대형서점엔 협상이 시한을 계속 연장해 가자 관련 서적 판매량이 더 늘어났다. 협상 분야 스테디셀러인 ‘협상의 법칙’(허브 코헨 지음)의 경우 FTA 협상이 진행되면서 매일 3~4권씩 팔리다가 협상이 타결된 4월 2일 당일엔 판매량이 39권까지 늘었다. 교보문고 조사 결과, 협상·설득 부문 서적은 3월 한 달에만 1633권이 팔리면서 지난달에 비해 판매가 두 배로 늘었다.
인터넷서점에도 협상학 관련 서적에 대한 조회수가 급증하고 있다. 인터넷서점 ‘예스24’의 경우 FTA 협상이 절정에 달했던 지난 1일 협상 관련 서적 인터넷 주문은 194건에 달했다. 불과 일주일 전인 25일보다 판매량이 73% 늘었다는 분석이다.
협상술 배우기도 열풍이다. 협상 관련 교육단체에 수강생이 몰리고 있고, 대학의 협상학 강좌에도 학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협상술 전문교육기관 세계경영연구원에는 최근 문의전화가 폭주하고 있고, 연세대 경영학과의 ‘경영협상론’ 강좌와 올해 처음으로 개설한 이화여대 국제학과의 ‘국제협상전략’ 강좌에 학생들이 몰려 수강신청을 조기 마감하는 사례를 빚기도 했다.
전성철 세계경영연구원 이사장은 “협상술에 있어서 초보단계에 머물던 한국이 노련하고 세련된 미국의 협상전문가 집단과 한 테이블에서 비교적 대등한 수준의 협상을 펼치는 과정이 매스컴을 타면서 기업은 물론 일반인들도 협상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 같다”고 분석하며 “이는 우리 사회가 협상을 통한 문제해결이라는 성숙된 구조로 가는 바람직한 과정”이라고 평가했다.
협상전문가들은 이번 한·미FTA 협상에 대해 “양국 협상 프로들 간의 세련된 테이블”이었다고 평가한다. 한국 국민의 거센 반발에도 협상장에서 거칠게 밀어붙인 미국 협상팀이나 이를 맞받아치며 마지노선을 지켜낸 우리 협상팀이나 ‘적정선’의 결과를 이끌어냈다는 것이다.
덜 주고 더 받는 게 협상의 승리. 전문가들은 노사문제나 연봉협상은 물론, 물건을 흥정하거나 심지어 부부싸움 등 크고 작은 협상에서 몇 가지 노하우만 알면 ‘우위’에 설 수 있다고 조언한다.
1. ‘기싸움’에서 밀리면 끝이다
통상 협상 과정에서는 ‘먼저 양보하면 상대에게 밀릴 수 있다’는 생각이 테이블을 장악한다. 때문에 답보 상태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이번 협상에서도 막바지에 이르자 한·미 협상팀 간에는 밀리지 않으려는 기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됐다. “쌀은 레드라인이다. 건드리면 결렬도 불사한다”는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의 압박에 미국은 “쇠고기 개방을 문서로 보장해달라”고 대응했다. 우리는 이미 국민에게 약속했으니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주장은 고전적인 수법으로,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한 엄포성 행동이 뒤따른다.
협상은 결국 시한이 있어야 마지막 몇 시간을 앞두고 결정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번 협상에서도 시한을 48시간 연장하고도 20분만 남겨둔 상황에서 타결됐다. 이를 ‘데드라인 게임’이라고 하는데 결국 누가 기싸움에서 밀리지 않느냐가 마지막 손익을 결정한다는 분석이다.
2005년 11월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차 방한한 부시 대통령이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에게 “어느 고등학교를 나왔죠?”라고 물었을 때 “대통령께서 나온 학교보다 좋은 곳을 나왔다”고 받아친 일화도 기싸움의 한 측면이다.
2. 내부의 반대를 적극 활용하라
협상타결 직후 노무현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를 통해 “반대론자들의 주장이 합리적인 논리와 근거를 바탕으로 하지 않았다”면서도 “반대하는 분들의 주장이 우리의 협상력을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됐을 것이며 전략적으로 그렇게 하는 분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바로 내부의 반대를 적극 활용했다는 이야기다.
전국적인 규모로 단행된 FTA 반대 시위는 결국 협상단으로 하여금 물러설 수 있는 여지를 좁혔고, 이는 미국 측에 대한 강한 압박으로 작용했다. “나를 밟고 가라”는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의 단식 농성이나 “우체국보험을 잘못 건드리면 전국 곳곳에 포진해 있는 20만 집배원이 오토바이를 타고 몇 시간 내에 모여들어 엄청난 반대 시위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고 반대 목소리를 높인 신제윤 금융분과장(재경부 국제금융심의관)의 발언이 그것이다.
미국 협상단 역시 비슷하다. “당신의 요구를 들어주고 싶어도 의회가 거절할 것”이라고 말하는 전략은 자기의 권한 밖이라는 뜻에서 ‘제 손 묶기(tied-in-hand)’ 전략이라고도 부른다. 미국 측은 이 전략으로 우리 측 요구인 전문직 비자 쿼터 허용 등을 피해갈 수 있었다.
3.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FTA 협상 초기부터 미국은 무역촉진권한(TPA)에 의한 협상 시한이 3월 31일 0시(미국시간 30일 오후 6시)에 끝난다는 점을 계속 강조했다. 이때까지 타결이 안 되면 한·미FTA 협상은 끝장이란 점을 강조한 것이다.
31일 오전 4시 30분께 배종하 국장은 쇠고기 시장을 15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개방하겠다는 최후 통첩안을 제시했다. 미국은 당황했다. 당초 기대안에 턱없이 못 미쳤다. “마감 시한이 이미 지났는데 한국이 정말 협상을 깰 의지마저 있는 것 아닌가.” 결국 미국은 협상 시한을 다시 48시간 연장했고 쇠고기 협상에선 한국 측 안을 대폭 수용했다.
협상단 한 관계자는 “미국이 막판까지 밀어붙이다가 협상 시간을 덜컥 연장해버릴 가능성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며 “1998년 한·미 자동차 통상 마찰로 발동한 수퍼 301조를 해결하기 위한 협상 당시에도 미국이 써먹은 수법”이라고 지적했다.
4. 유머와 비유로 상대를 녹여라
“신기한 책략은 하늘의 이치를 다했고, 오묘한 계산은 땅의 이치를 꿰뚫었도다. 전쟁에 이겨 이미 공이 높으니, 만족함을 알고 그만두기 바라노라.”
지난 3월 8차 협상 마지막 날 미국 협상단에 을지문덕 장군의 한시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의 원문과 영역본을 보낸 배종하 농림부 국제농업국장의 편지는 ‘예외 없는 관세 철폐’ 원칙을 내세워 압박해 들어오는 미국 협상단에 신선한 유머를 한 줄 선사함으로써 숨 막히는 협상장 분위기에 여유가 감돌게 했다.
지나친 아부는 무례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협상에선 금물이지만 적절한 위트를 가미한 칭찬은 상대방의 긴장을 풀게 하는 양념이다.
적절한 비유도 상대에 대한 설득력을 높인다. 수산물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미국 측이 꿈쩍하지 않자 한국 협상팀 한 관계자는 “명태는 농업분과의 쇠고기와 같다”고 미국 측을 설득했다. 그 순간 해양부 고위 관계자가 느닷없이 끼어들었다. “무슨 말씀. 명태는 농업의 쇠고기가 아니라 바다의 쌀”이라는 그의 한마디는 한국 측 입장에서 명태가 얼마나 중요한지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5. 판 깰 준비를 하라
협상이 지지부진할 때는 충격요법이 필요하다. 그 중에서도 협상장을 먼저 박차고 나가는 것은 상대방에게 극적인 효과를 줄 수 있다. 2차 협상 때 미국이 우리 측 약제비 적정화 방안 도입 계획에 반발해 의약품 분과 회의를 일방적으로 중단시킨 것이 대표적이다. 4차 협상 섬유분과에서 미국이 제시한 양허안을 앉은 자리에서 내던지고 일어난 것도 그에 버금간다. 양보에 소극적이던 상대편 분과장이 물러나고 고위급이 나서면서 절충안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5차 협상 때 무역구제 분야 최후통첩을 하면서 자동차와 의약품 회의까지 한꺼번에 중단시킨 것도 극적인 효과를 배가했다.
인터뷰 | 전성철 세계경영연구원 이사장
“최소한 명분과 자존심은 지켜줘야’
IGM(Institute of Global Management)은 국내에서 가장 손꼽히는 협상스쿨로 통한다. 세계경영연구원이 2005년부터 기업의 최고경영자(CEO), 임원, 팀장급 실무진을 대상으로 운영하고 있는데 교육 이수자만도 현재 약 2500명. 특히 한·미 FTA 협상이 진행된 지난 1년 동안 무서운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
통상 전문 국제변호사인 세계경영연구원 전성철 이사장은 “협상이란 상대방의 생각을 바꾸는 기술로, 상대방 생각이 바뀌면 그에 따라 내 운명이 바뀔 수 있는 엄청난 일”이라고 말했다. 전 이사장은 “이번 협상을 관전하는 핵심 포인트는 한·미FTA 협상의 공은 사실상 처음부터 한국의 손에 있었다는 점”이라며 “무엇보다 한국이 먼저 미국이라는 세계 제1의 경제 대국에게 FTA를 하자고 제의한 것 자체가 상식을 넘어선 일로, 그것은 정말 ‘울고 싶은 어른의 뺨을 때려준 간 큰’ 결심이었다”고 말했다.
- 이번 한·미FTA 협상을 평가한다면.
“협상 승패를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타결 여부가 아니라 ‘양쪽‘ 모두 상당한 충족감을 느껴야 하는 것이다. 한쪽이 ‘쥐어 짜였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잘 된 협상이 아니다. 여러 가지 징후로 볼 때 이번 협상에서는 양쪽이 대체로 만족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 판단 기준은 무엇인가.
“우선 협상을 통해 충족하고자 하는 각자의 필요(협상 전문 용어로 interest)를 보아야 한다. 우선 한국의 인터레스트는 무엇보다 대미 통상에서 실리를 얻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하게 미국과 FTA를 체결함으로써 세계와 직접 연결할 수 있는 고속도로를 얻고자 했을 것이다. 문제는 그 대가로 한국이 얼마나 주느냐 하는 것이다. 한국이 이번 협상에 대해 대체로 만족하는 것은 한국이 준 것이 걱정했던 것만큼 크게 많지 않았다는 점에서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미국의 인터레스트를 파악할 때 이해가 가능하다.”
- 그렇다면 미국의 인터레스트는 무엇이었나.
“미국은 이미 거의 다 개방된 나라다. 자신이 이미 열려 있기 때문에 어느 나라든 그 나라의 시장을 조금이라도 더 개방할 수 있다면 미국은 환영한다. 경제 규모가 워낙 크기 때문에 다른 나라의 문을 열기 위한 추가적인 양보는 사실 크게 부담이 없다. 더욱이 한국은 세계 11위의 동북아 경제 대국이고 한국과의 FTA는 중국과 일본의 빗장을 여는 물꼬를 제공할 가능성도 상당히 높다. 특히 정치적 곤경에 처한 부시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한·미FTA라는 호재는 크게 도움이 된다. 그런 면에서 미국에게는 이번 한·미 FTA 타결이 타결 그 자체로서 매우 큰 인트레스트였다.”
- 협상의 기술이 있다면.
“협상에 임하는 어느 개인이나 국가나 최소한 지켜야 할 명분과 자존심, 그리고 모양새가 있는 법이다. 그런 명분과 자존심을 지켜주며 나의 실리를 취하는 것이 바로 협상의 기술이다. 이 협상의 기술은 대부분 크리에이티브 옵션(creative option)이라는 수단을 사용한다. 즉 상대의 자존심과 필요를 나의 이해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충족시켜주는 기술이다. 이번 협상에서는 비교적 크리에이티브 옵션이 많이 보이는 편이다. 예를 들어, 민감한 쇠고기 문제를 문서로 작성하지 않고 대통령 연설에 포함시키도록 한 것이라든지, 개성공단 문제는 ‘역외가공구역’이라는 개념을 활용해 한 것이라든지, ISD 조항에 세금과 부동산 문제 등을 제외시킨 것이라든지 하는 것이 그런 예다.”
출처 : 뉴스메이커<조득진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