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애플사의 성공을 얘기할 때 항상 언급되는 사례가 바로 MP3플레이어 ‘아이포드’다. 소비자들은 단순히 아이포드의 기능 때문에 열광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지갑을 연 것은 바로 디자인 때문이었다. 덩달아 디자이너인 조나단 아이브도 스타 반열에 올랐다. 초콜릿폰(LG전자), 싼타페(현대차), 블루블랙폰(삼성전자) 등 한국 기업의 기세도 만만찮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대기업에 국한된다는 지적도 있다. 산업 현장은 물론 학계, 정부의 공동 노력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때다. 산업디자인의 경쟁력을 디자인산업 육성으로 연결시키는 방안에 대해 각 분야 전문가들의 의견을 모아봤다.
■ 대담자 : 김호원 산업자원부 미래생활산업본부장
조벽호 홍익대 산업미술대학원장
차강희 LG전자 MC디자인연구소장
■ 사회 : 노성호 부장 ■정리 : 박수호 기자 ■사진 : 송은지 기자
Q> 노성호 부장 : 향후 한국은 ‘디자인’이 먹여 살릴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국 디자인의 경쟁력이 어느 정도까지 왔다고 보시는지요.
A> 김호원 본부장 : 현재 우리나라의 산업디자인 수준은 선진국의 80~90%까지 왔다고 봅니다. 과거에 비하면 아주 빠른 속도로 성장한 것이지요. 수치로도 명확히 드러납니다. 2002년 뉴질랜드 경제연구소에서는 한국 디자인의 경쟁력을 세계 25위로 봤습니다. 3년 후인 2005년 헬싱키대학의 평가에서는 14위를 기록했지요. 현재는 11위 정도로 추정됩니다.
A> 차강희 소장 : 제가 몸담고 있는 연구소 인력들은 수시로 해외 디자이너들과 교류합니다. 함께 작업을 할 때도 있고 경쟁을 하기도 하지요. 현장에서 보면 우리 디자이너들이 때로는 선진국 디자이너들을 앞서는 경우도 있습니다. 휴대전화나 자동차 등에서는 세계 디자이너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A> 조벽호 원장 : 생활 속에 디자인이 자연스레 자리 잡고, 또 그 중요성이 강조된 지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소비자의 까다로운 취향이 디자이너들의 변화로 이어지는 등 우리나라의 디자인 경쟁력은 날로 높아지고 있습니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종전의인식이 ‘형태가 기능을 수반한다’란 명제로 바뀌고 있다는 말이지요. 최근 기업들이 디자인을 먼저 설정하고 거기에 부품을 맞춰 넣는 것도 이런 맥락입니다. 디자이너의 역량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인 것이지요.
Q> 노부장 : 하지만 우리 기업의 산업디자인 경쟁력은 일부 분야를 제외하고는 높다고 보기 힘들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A> 김 본부장 : 산업디자인의 경쟁력이 세계 수준에 근접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대기업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산업자원부의 조사 결과 중소기업의 CEO들 중 50% 정도는 ‘디자인경영’에 대한 인식 자체가 낮은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우리나라의 산업기술 경쟁력이 6위권인 점을 감안할 때 11위권인 디자인 경쟁력을 보다 강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장 디자인을 선도하는 대기업이 협력업체를 지원하는 방안부터 필요합니다.
A> 조 원장 : 선진국형 모델이 있다면 한국형 디자인만의 차별성이 있어야 하는데 이 부분이 취약합니다. 질적인 부분 즉, 생활 속에 디자인이 살아 숨쉬고 있느냐가 결국 그 나라의 디자인 경쟁력을 좌우하지요. 거리를 걷다 보면 간판들의 난립, 시멘트벽, 특색 없는 건축물 등 공공 디자인 분야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놓치고 사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일상 속의 디자인부터 꾸준히 바꿔나가야 합니다.
A> 차 소장 : 해외 유수의 디자이너와 교류하다 보면 큰 차이를 느끼지는 못 합니다. 하지만 각론으로 들어가면 얘기가 좀 달라집니다.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지요. 차이는 그것을 구현하는 데서 드러납니다. 우리의 경우 창의적인 생각은 있는데 그것을 밀도 있게 완성도를 높여가는 부분이 취약하지 않나 싶습니다.
Q> 노 부장 : 우리나라의 소비자들은 인터넷 덕분에 상당히 빨리 선진 디자인을 접하고 있습니다.
A> 차 소장 : 그것이 디자이너로서 고민거리이자 또한 기회라고 봅니다. 지금은 세계 어느 나라의 디자인도 실시간으로 검색할 수 있습니다. 정보가 빠른 만큼 소비자들의 눈이 높아져서 어떤 때는 디자이너로서 그들의 수준을 맞추기가 버거울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곧 디자이너들의 상향평준화로 이어집니다. 이 점은 다른 나라 디자이너들과 차별성을 갖출 수 있는 좋은 여건이지요.
A> 조 원장 : 요즘 우리 학생들을 보면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정보력에서 앞선 학생들이 포트폴리오를 들고 해외 시장에 문을 직접 두드리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취업난이 심화되는 것도 원인이긴 하지만 정보화 덕분에 그만큼 세계가 가까워졌기 때문이죠. 지금은 졸업 후 나이키, 아우디, BMW 등 해외 업체에 곧바로 취업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디자이너들에게는 기회가 더욱 많아졌다고 볼 수 있지요.
Q> 노 부장 : 최근 피터 슈라이어 기아차 디자인 담당 부사장의 강연회가 있었습니다. CEO는 큰 틀만 제시하고 디자이너에게 자율성을 부여해야 한다고 역설했는데요, 일선 기업의 현장에서 느끼는 디자이너의 자율성은 어떤지요.
A> 차 소장 : 디자이너들을 보면 개성 있는 외모의 소유자들이 많습니다. 그만큼 남들과 다르다는 철학을 갖고 사는 것이지요. 이는 곧 창의성으로 이어집니다. 특히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가 많은 한국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소비자들의 요구를 따르기보다 소비자들의 안목을 이끌고 나가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디자이너의 중요성을 회사에서도 잘 압니다. LG전자는 물론 글로벌 전략을 펼치는 기업들은 근무 여건을 디자이너 중심으로 맞춰주는 등 최대한 배려하고 있습니다.
A> 조 원장 : 이제는 기업에서도 CDO(디자인 담당 최고경영자)가 나와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는 한해 3만8000명의 산업디자인 인력이 배출됩니다. 인프라로 봤을 때는 미국에 이어 2위권이지요. 하지만 이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국내 모델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디자이너들의 위상이 높아졌다고 하지만 아직까지도 멀지 않았나 싶습니다.
A> 김 본부장 : 현재 디자이너를 고용한 업체들은 2만6000개에 이릅니다. 하지만 임원급에 오른 디자이너들은 손에 꼽을 정도지요. 디자이너들이 보다 실질적으로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CEO들의 배려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CEO의 인식 변화를 위해서 최근 산자부에서는 산하기관인 디자인진흥원을 통해 중소기업 CEO들을 위한 디자인 경영 과정을 운영하고 있기도 합니다.
노 부장 : 정부 지원책이 많다고 하지만 현장에서 느끼는 체감도는 낮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A> 김 본부장 : 산자부의 산업디자인 지원 예산은 일년에 약 400억원을 조금 넘는 수준입니다. 이는 LG전자, 삼성전자 등 기업의 디자인 관련 예산보다도 적은 규모지요. 차세대 디자이너, 신세대 디자이너 선정 등 지원책도 많지만 아무래도 한정된 예산이다 보니 사업을 펼치기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예산만 탓할 수는 없지요. 정부는 민간, 학계가 효율적으로 공존할 수 있도록 디자인 클러스터를 조성하고, 인식 전환을 위해 비전공자를 위한 디자인 입문서 발간 등 여건 마련에 힘쓰고 있습니다. 최근 원주의료기기단지가 강원도 지역 대학들의 디자인학과와 연계하고 있는 것도 그런 사례 중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A> 차 소장 : 지금은 ‘스타 디자이너’가 필요한 때입니다. 그래야 많은 전공자들이 꿈을 가집니다. 디자이너들의 기를 살려줄 수 있는 정책들이 많이 나와야 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산자부에서 실시하고 있는 산업디자이너들에 대한 포상을 보다 강화하고 개별 기업들의 성공사례를 공유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줬으면 합니다. 언론의 역할도 단순히 소개 차원을 넘어 ‘디자인이 곧 부국’이란 인식 하에 적극적으로 디자이너들을 발굴하고 알려야 합니다.
A> 조 원장 : 산업 현장에서 땀 흘리고 있는 제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삶의 질은 꿈도 못 꾼다고 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실제로 중소기업에서는 일선에서 일하고 있는 디자이너들의 대우를 개선하는 데 한계가 있다더군요. 정부가 애정을 갖고 정책적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Q> 노 부장 : 학계에서는 기업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을 기회가 적다고 하고 현장에서는 뽑으면 재교육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이를 해소할 방법은 없을까요.
A> 차 소장 : 현재 일선 교육은 천편일률적인 학제를 그대로 이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기업 환경은 만만치 않습니다. 이제 산업디자이너들은 상품기획, 마케팅도 알아야 더욱 좋은 제품을 만들 수 있는 시대입니다. 단순히 한 우물을 깊게 파는 것보다 폭넓은 시야를 확보하고 트렌드를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을 익히도록 학계의 변화가 절실한 때입니다.
A> 조 원장 : 최근 학계에서는 ‘통섭’이 화두입니다. 여러 학문들이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자율적으로 뭉치는 것이지요. 실제로 일선 학교에서는 학제 간 통합이 점진적으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자율전공제도 한 예가 되겠지요. 학생들에게 전공과목에 대한 부담을 줄여주고 다양한 과목을 들을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인데요, 디자인학부 학생들도 경영학 수업을 듣는 등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습니다.
A> 김 본부장 : 하지만 아직도 대학들은 색채, 시각 등 현장과 거리가 있는 교육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산자부에서는 이런 간극을 좁히기 위해 디자인 전공자 중 미취업자들을 대상으로 산업 현장에서 인턴사원으로 일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운영 중입니다. 제도를 운영해보니 기업과 취업지원자 간의 인식차가 상당함을 알 수 있었습니다. 산·학협력을 바탕으로 실질적인 현장교육이 실시돼야 한다고 봅니다. 아울러 정부 차원에서도 중복 지원을 피하고 효율적으로 디자이너를 지원하기 위해 디자인산업진흥법을 국회에서 발의한 상태입니다.
Q> 노 부장 :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타결됐습니다. 이는 산업디자이너에게 위기일까요, 기회일까요.
A> 차 소장 : 글로벌 스탠더드에 적합한 세계적 디자이너들의 국내 진출이 활발해질 수 있습니다. 그만큼 국내 디자이너들의 입지가 위축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이 될 수 있습니다. 디자이너의 역량도 덩달아 오를 테니까요.
A> 조 원장 : ‘지피지기’란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FTA 타결 이후에는 ‘지기지피’가 돼야 합니다. 우리의 취약성, 정체성이 뭔지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경쟁이 심화될수록 자생력을 키우기 위해 디자이너들이 발버둥칠 겁니다. 그때 중요한 것은 우리만의 특성을 소개할 수 있어야겠지요.
김 본부장 : 한국 문화를 상품화하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한국 디자이너의 역할이 필요한 대목이지요. 한류 스타들의 아이콘이 동남아에서 히트치듯 세계 시장의 교두보인 미국을 공략하기 위해 보편성은 물론 지역성을 겸비한 아이템들이 한국 디자이너들의 손에서 나올것으로 기대합니다.
출처 : 매경이코노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