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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돈줄과 연구의 정치경제학2005-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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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동민의 칼럼 <비판 경제학>

아빠 직업을 묻던 유치원생 딸아이에게 “(사회)과학자”라고 대답해 주었더니, 그러면 로봇 한번 만들어 보라고, 로봇도 못 만드는 과학자가 이 세상에 어디 있냐고 핀잔을 주던 기억이 난다. 그저 빙그레 웃음 짓게 만드는 추억거리이건만, 거창하게 말하자면 오늘날 대학에서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이 처한 현실의 한 단면을 보여 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마땅히 둘 만한 곳이 없어 강의실 안에 책가방을 들고 들어가야 했던 시간강사 시절에는 그저 때 되면 꼬박꼬박 월급 나오고 내 이름 붙어 있는 연구실만 있다면 노벨상 탈만한 연구인들 못하겠냐 싶었다. 막상 정규직 교수가 되고 나서야 교수가 하는 일이 결코 강의와 연구 뿐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그 중에서도 미처 짐작하지 못했던, 힘들고 자괴감이 들기도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연구비를 지원받기 위해 때로는 그럴 듯하게 포장을 잘 해서 매우 중요한 연구를 하는 것임을 입증해야 하는 연구계획서를 쓰고 또 그 결과를 기다리는 일이다.


연구 방향에 영향 미치는 지원금

사실 적어도 개인적인 경험에 국한하자면 하다못해 실험용 쥐 한 마리 필요하지 않고 그저 몇 권의 책과 연필, 종이만 있으면 되는 연구를 주로 하다 보니, 연구비를 받을 필요도 별로 없지만 주겠다는 곳도 거의 없는 형편이다. 물론 그 몇 권의 책이나마 쉽게 살 수 있도록 해 주느냐 아니냐는 나름대로 차이가 있다.

산발한 머리에 흰 가운을 걸친 반미치광이 같은 괴짜박사가 차고 뒷켠 허름한 실험실에서 플라스크 몇 개와 망치 하나로 타임머신도 만들어 내고, 때로는 지구를 지키는, 때로는 세계를 정복할 놀라운 발명품을 만들어내는 헐리웃 영화에서나 보는 과학연구에 대한 상투적 이미지는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지 오래이다. 수억 원, 때로는 수십억 원의 연구비가 지원되지 않으면 하루도 연구를 지속하기조차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 막대한 돈이 어디에서 조달되느냐 하는 것은 연구의 성과는 물론 진행방향에까지도 영향을 미칠 것임은 자명하다. 하다못해(?) 로봇이라도 만들어내어야 하는 자연과학이나 공학연구라면 연구의 결과가 비교적 객관성을 띠게 될 것이므로 이러한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과학사가들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이것 또한 우리가 갖고 있는 상투적 이미지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제 아무리 복잡한 미분방정식과 통계분석으로 무장하고 있더라도, 궁극적으로 특정 계층이나 집단, 또는 계급의 물질적 이익과 분리되기 어려운 사회과학적 연구에서는 애당초 출발선에서부터 돈줄(!)이 어디서 나오느냐라는 문제가 연구방향은 물론 그 결론까지도 어느 정도 한계를 짓고 시작하는 요인이 될 소지가 크다.

최근 한 달여 동안 대학의 연구와 관련된 뉴스라면 압도적으로 황우석 교수의 놀라운 성과에 대한 것이겠지만, 실상 오히려 더 본질적인 것으로는 두 명문사립대학에서 벌어진 일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고려대학교의 명예박사수여 해프닝과 연세대학교의 친일연구기금 논란은 학문연구와 돈줄의 정치경제학, 현대 자본주의사회에서 점점 더 심각해질 수밖에 없는 그 긴장관계를 보여주는 적절한 사례들일 것이다.


재벌기업 돈줄로 하는 강의 많아

최소한 인터넷이나 언론보도를 통해 접하는 일반인, 무엇보다도 학생대중 (학생회나 정치성을 띤(?) 학생들과는 구별되는 의미에서)들의 반응은 꽤 다른 듯하다. 명예박사수여식의 소동이 대중적 관심으로부터 유리되어 과격한 행동을 일삼는 학생회간부에 대한 성토, 나아가 학생회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이어지는 반면, 일본 극우주의자로부터 유래한 연구기금은 형식상으로는 해당 대학과 독립적인 모양새를 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격렬한 인신공격성 비판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고려대 학생들을 징계하지 말라고 주장한 교수단체의 요구에 대해 준엄하게 비판하면서, ‘산학협동’과 명예박사수여가 뭐가 다르냐고 반문하였다는 얘기도 들린다. 극우파로부터 나온 기금이 연구의 방향이나 내용에 대해서는 아무런 제약도 가하고 있지 않다는 관계자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강변”에 “친일파의 헛소리”로 치부되는 반면, 한국 최고의 재벌에게 수여한 명예철학박사학위가 터무니없는 것이라는 주장은 경제성장에 대한 기여나 세계초일류기업에 대한 부러움과 두려움이 뒤섞인 평가 속에 파묻혀버리고 만다. 대중가수의 해프닝성 친일발언에 격노하던 우리의 젊음들은 이미 익숙해져버린 현실 앞에서는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은 것인지 분간할 의지조차 없는 듯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재벌기업을 돈줄로 하는 연구원이 전국 대학에서 여는 맞춤형 강의에서는, “이 땅의 좌익”에 맞서 비분강개하며 궐기를 선동하던 이들이 시간강사료의 열 배쯤 되는 강사료를 받으면서 “시장경제의 운행원리를 올바로 이해시키고 반기업정서를 불식”하기 위한 강의를 하고 있다.

◎ 류동민 교수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필자는 경제 및 사회현실에 광범위한 사회 현상에 대한 활발한 글쓰기를 하고 있다.

출처: 국정브리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