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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절반의 성공'으로 끝난 조용필 콘서트2005-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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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드디어 조용필이란 말이지!'

조용필이 평양공연을 한다는 소식에 다들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남한 가수의 북한 공연의 흐름으로 볼 때, 이번의 조용필 공연은 어쩌면 정해진 수순일 수 있다. 여러 명의 가수들이 함께 올라가 공연하는 방식만 가능했던 1990년대의 수준을 지나, 2001·2002년 두 차례에 걸친 김연자의 단독 평양공연, 2002년 이미자의 단독 평양공연을 거쳤으니, 이제는 조용필 차례가 된 것이다.

이것으로 남한 가수의 북한 단독공연은 가볼 때까지 가본 게 아닐까 싶다. 조용필이 누구인가? 대중가요사 연구자로서 단언하건대, 나에게 한국대중가요사에서 단 한 명의 가수를 꼽으라 한다면 주저 없이 조용필을 꼽을 것이다.

그는 가장 긴 기간 동안, 가장 넓은 세대들의 호응을 받으면서, 가장 다양한 양식을 소화해낸 사람, 이 점에서 그를 능가할 인물이 아직까지는 전무후무하다. 남한 최고의 가수가, 그것도 '제주에서 평양까지'라는 야심찬 기획의 일환으로 치러낸 것이니, 앞으로 단독공연으로는 이를 능가하는 기획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조용필이 누구인가?!

어제(23일) 평양 유경체육관에서 무사히 끝낸 공연을 텔레비전 녹화방송으로 본 느낌은 꽤나 복잡하다. 유달리 컸던 기대와 우려 때문이었을까? 언론사의 기사나 조용필의 인터뷰는 그럭저럭 감동스럽고 만족스러운 공연이었다는 논조이다.(완벽주의자 조용필이 아쉬움과 반성을 피력한 것은 물론이었지만.) 그러나 나는, 이들 기사의 감격들보다는 아쉬움이 훨씬 컸다.

물론 이번에 해낸 성과는 적지 않다. 평양 공연이 끝난 지 불과 3시간 만에 남한 텔레비전으로 공연 전체를 보는 묘미도 대단한 것이었지만, 무엇보다도 2002년 유경체육관 개관 기념 공연 때 조심스럽게 시도해보았던 육로를 통한 공연단 입북이, 이번에는 훨씬 더 대규모로 이루어졌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육로를 통한 공연단 입북이란 단지 통로의 상징성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중국을 통한 하늘길로 공연단이 이동하게 되면, 대규모의 인력과 장비 이동이 불가능해진다. 여태까지 평양에서 이루어진 남한 가수들의 공연은, 대부분 반주자도 없이 달랑 가수들만 올라가, 생판 처음 보는 북한 연주자와 음향기술자, 북한의 무대미술과 고작 몇 시간 맞춰보는 막을 올리는 참담한 공연들이었다. 노래의 질을 좌우하는 악기 연주와 음향, 그 외의 조명 등 무대미술 등을 거의 포기한 상태였던 셈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육로로 이동했기 때문에 대규모의 스태프와 장비들이 따라갈 수 있었다.

이번 공연의 무대미술이 유달리 화려했던 것은 바로 그 이유에서이다. 제주에서 시작한 '2005 Pil&Peace' 무대를 그대로 가지고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시로 움직이는 화려한 색조명은 물론이거니와, 웅장한 그래픽화면으로 시작한 첫 부분부터, 무대와 객석을 가리지 않고 체육관 전체에 종이가루를 뿌리는 마지막 장면까지 그 화려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공연 첫 머리에서부터 평양 관객은 무대미술의 화려함에 압도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정작 노래는, 무대만큼 객석을 장악하지 못했다는 것이 나의 느낌이다. 물론 나는 현장에서 공연을 보지 못했고, 텔레비전을 통해 들리는 박수소리와 간간이 카메라에 비춰진 관객 표정으로만 짐작하는 것이어서 잘못된 판단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역시 김연자, 이미자 공연을 모두 텔레비전 화면으로 본 사람으로서 상대적인 비교를 할 수 있다. 특별히 이 공연만 카메라맨이 관객의 무표정만을 잡았다고는 할 수 없지 않겠는가.

그런데 평양 관객은 달랐다

우선 조용필은 초반부에 노래로 관객을 장악하는 데에 실패했다. 웅장한 영상과 함께 시작한 <태양의 눈>은 대중에게 호응을 얻기보다는 압도하려는 의도가 분명했으니 그렇다 치자. 이어지는 곡은 <단발머리>, <못 찾겠다 꾀꼬리>였는데, 아마 남한 무대였다면 객석이 뒤집어졌을 테지만 평양의 객석은 얌전했고 노래가 끝난 후에 박수소리도 미적지근했다.

브라운관을 통해서도 확실히 관객 반응이 다르게 전달되어 온 것은 <돌아와요 부산항에>부터였다.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끝나자 객석 휘파람소리가 들렸으며, 조용필의 중간 멘트에서 겨우겨우 뜨겁고 긴 박수를 유도해냈다.(사실 유머도 평양관객이 받아들이기에는 다소 썰렁했다.)

후반부의 <한오백년>에서 관객 얼굴이 민요의 희한한 해석에 흥미롭다는 반응이 떠올랐고, 북한 노래인 <자장가>와 <험난한 풍파 넘어 다시 만나리>에서 감격적인 반응을 거쳐, 일제시대 노래인 <황성옛터>와 <봉선화>에서 비로소 남북교류공연들에서 흔히 보이는 '감동바이러스' 감염 상태가 된 듯했다. 말하자면 평양사람들은 자신이 아는 노래들에만 적극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다.

그러나 공연의 태반은 평양사람들은 잘 모르는 생소한 노래들이었다. <봉선화>까지 겨우 풀어놓은 분위기는 다시 <미지의 세계>와 <여행을 떠나요>에서 가라앉았다(아마 조용필이 <여행을 떠나요>를 이렇게 얌전한 관객을 놓고 불러보기는 처음이 아닐까 싶다).

평양 관객들은 마지막에 함께 노래를 부르고 싶어했을 터인데도, 레퍼토리가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하필이면 앵콜곡도 <홀로 아리랑>으로 평양사람들의 입에 익은 노래가 아니었다. 이 곡은 북한의 요청이어서 북측이 제공한 악보로 급히 연습했다고 하는데, 재일교포들이 좋아하는 곡이어서 그간 교류 때 즐겨 선곡되었고 그 때문에 북측이 권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막상 화면에 비친 평양관객들은 거의 따라 부르지 못했다.

사실 누구나 대중가요 콘서트에서는 아는 노래를 듣고 싶어한다. 남한의 콘서트에서도 모르는 노래가 서너 곡만 계속되면 관객이 힘들어한다. 게다가 창법이나 연주법, 음향 등이 모두 생소하고 불편한데(조용필의 창법과 발음이 평양시민들에게는 적잖이 거슬렸을 것이며 엄청난 록사운드도 불편했을 것이다) 모르는 노래들만 줄줄이 쏟아져 나온다면, 뜨거운 박수가 나오기는 힘들다. 말하자면 조용필의 평양공연의 미적지근한 객석 반응은, 평양관객의 취향을 고려하지 못한(혹은 고려하지 않은) 결과이다.

김연자와 이미자의 차이

이런 결과는 김연자와 이미자 공연을 미루어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남한에서야 1980년대에 살짝 인기가 있다만 김연자를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에 비교할 수 없지만, 평양공연의 성공은 단연 김연자였다. 김연자는 자신의 히트곡이 아니라 식민지시대의 유명 대중가요를 주로 선곡하고 약간의 남한 노래와 북한 노래를 섞어 불렀다.

물론 이때에도 낯선 남한 노래에 대한 반응이 가장 냉랭했는데, 그래도 귀에 익은 식민지시대 노래와 북한 노래들 덕분에 분위기는 천정을 뚫고 나갈 지경이었다. 관객은 노래에 맞춰 박수를 보내며 환호했고 객석으로 내려가 노래를 부르는 김연자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그러나 주로 자신의 히트곡을 부른 이미자의 공연은 품격 있고 조용했다. 게다가 이미자의 청승스러운 1960년대 트로트 창법의 정조가 김연자의 1980년대식 '발랄섹시' 트로트의 분위기보다 평양시민들의 취향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 듯했다.

조용필이 첫 머리에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휘파람>이나 북한 민족가극 <춘향전>의 <사랑가> 같은 북한 노래를 함께 불렀다면, 레퍼토리의 30%만이라도 민요와 식민지시대 대중가요로 바꾸고 북한 노래 비중을 높였더라면, 하다못해 앵콜곡으로 금강산에서 내내 울려퍼지는 그 흔한 <다시 만납시다>라도 불렀더라면 반응이 얼마나 열렬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크다.

조용필이 이런 선택을 하지 못하게 한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자부심 혹은 자만심? 사실 이 두 가지는 종이 한 장 차이이다. 작품이 좋고 자신이 최선을 다하면 취향이야 어떻든 통할 것이라는 자부심이 관객 취향의 무시로 이어지기란 여반장인 것이다. 거기에 '제주에서 평양까지'라는 투어콘서트의 일관성에 대한 집착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어떻든 북한 관객에 대한 섬세한 고려의 태도는 아니다. 다시 말해 이 공연은 남한관객용이었다는 것이다.

자부심 혹은 자만심

문제는 이러한 자부심 혹은 자만심이, 비단 조용필만이 아니라, 남북예술문화교류를 할 때에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교류란 상대방을 알고 배려해야 성공할 수 있을 터인데, 남한 사람에게 북한의 예술문화는 늘 관심 밖이었다.

남한 사람들은 한동안 북한 노래가 유행이었다고들 이야기하면서도, 실제 아는 북한 노래란 <휘파람>과 <반갑습니다>가 고작이다. 우리는 여전히 북한의 예술문화를 교류의 상대로 인정하기보다는 무시와 무관심의 대상으로 놓아두고 있다. 북한 공연단이 서울 공연을 오면 그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가지지만, 정작 인적 교류가 수반되지 않은 채 미술품이나 영화 작품만 오면 그 냉랭한 무관심이란 기가 막힐 정도이다.

우리는 북한 사람들이 휴전선을 넘어 남한 땅을 밟는다는 정치·사회적 사건에 관심을 가지는 것일 뿐이다. 물론 북한의 예술문화가 우리 취향에는 전혀 맞지 않고, 그런 점에서 미감을 느끼기가 힘들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에 대해 다른 문화권의 것이라고 이해하는 문화상대주의적 입장을 가져야만 최소한의 교류란 것이 성립되는 것이다.

북한은 그런 태도를 지니고 있지 않은데, 우리만 그러면 무슨 소용이냐고? 우리는 자존심도 없냐고? 최소한의 상호주의적 원칙은 지켜야 한다고? 원칙적으로는 옳은 말이다. 평화공존은 양쪽 모두 상대편의 문화에 대한 너그러운 시선을 가져야만 가능하다.

그러나 남북의 경제력 차이가 여실하고 북한 사회의 변화가 유턴할 수 없도록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남북의 평화공존이, 남북의 활발한 문화교류가, 어느 방향으로 기울며 흘러갈지는 불 보듯 뻔하다. 예술문화 교류에서 양보할 만한 여유가 있는 쪽은 남한이고, 양보해도 결코 손해가 아닌 것이다.

북한이 예술문화 개방을 감행할 때에 생겨날 정치적 파장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말하자면 우리가 북한의 예술문화를 이해하고, 그들의 취향에 맞추어 평양공연의 절반을 북한 노래 레퍼토리로 채워도, 얄팍한 정치적 계산을 두드려보면 남한으로서는 결코 손해가 아니다. 그러나 북한관객을 충분히 고려해주지 못하는 우리의 예술문화적 자부심이 좀더 큰 교류성과를 이끌어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아쉽기는 하지만 이번의 조용필 평양공연으로, 남북예술문화교류의 한 장이 다시 넘어갔다. 앞으로도 중요한 정치·사회적 교류의 진전이 있을 때마다 행사성의 공연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사성 공연의 교류는 웬만큼 해본 셈이니, 이제는 좀더 조직적이고 장기적인 계획을 고민할 때이다. 상대편의 예술문화 수용능력을 명확하게 계산하며 교류 계획을 짜는 것, 이제는 피할 수 없는 숙제가 되었다.


출처 : OhmyNews 이영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