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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비정규직과 체념의 미학?2005-07-27
작성자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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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동민의 칼럼 <비판 경제학>

비정규직 노동의 문제는 드디어 트렌디 드라마에서 조차 다루어지는 주제로 떠오를 만큼 한국 사회에서 중요하면서도 일상적으로 겪는 문제가 되었다.

비록 백마 탄 왕자님이나 때로는 공주님을 만나 급격한 신분상승을 이루고야 말 것이라는 판타지는 여전히 남아 있지만 말이다. 국가인권위의 결정에 대한 노동부장관의 가시 돋친 응수에서 보듯, 비정규직의 문제를 ‘인권’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와 ‘자본’의 시선 또는 하다못해(?) 경제관료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의 판단결과는 큰 차이가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미 오래 전, 칼 마르크스가 설파한 바와 같이, 동등한 권리와 권리가 맞서는 지점에서는 결국 힘이 그 결과를 결정한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계급투쟁을 묘사하거나 선동하는 무시무시한 문장으로 읽힐 수도 있으나, 때에 따라서는 힘없는 놈은 결국 참을 수밖에 없다는 체념의 메시지로 읽히기도 한다.


'일 년 또는 이 년의 계약' 교수채용 광고

서울 시내의 어느 중견 사립대학에서 최근에 있은 일이다. 말이 나온 김에 중견이라는 말은 참으로 편리한 표현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한국사회의 극단적 서열체계 내에서 적당히 나쁘지 않은 위치에 있다는 의미로서 예컨대 중하위권(또는 중상위권) 대학이라는 말보다는 부르기에 편하고 듣기에도 즐거운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한국의 대학(특히 사립대학)들의 전형적인 축적구조를 그대로 밟아 와서 대과 없이(!) 남부럽지 않은 위치에 이르렀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이다.

어쨌든 그 중견대학에서 한 번에 수십여 명의 교수채용을 위한 광고를 냈고 물색없는 국외자의 눈으로 보면 그 광고는 “명실 공히 사학 명문으로 발돋움”하는 과정에서 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한 획기적인 조치로 보일 뻔도 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예를 들어 ‘경제학과’ 또는 ‘경제학 전공’ 식의 세부구분도 없는 공고는 차치하더라도, 촉박한 지원일정에다 1차 심사 마감 다음 날 2차 심사자를 통보하면 통보받은 이들은 또 다시 서류를 추가로 준비하여 달려 가야하고, 그 결과 그들이 얻는 자리란 일 년 또는 이 년의 계약으로 한 번에 한해 연장 가능한 ‘비정년트랙’ 교수라는 문안을 읽고 나면, 적어도 나처럼 대학 주위에서 맴돌고 있는 사람들의 눈에는 뻔히 그려지는 그림이 아닐 수 없다.

제대로 된 병원에서 치과의사에게 맹장수술을 시킬 리가 없듯이, 제대로 된 대학에서 세부전공구분 없이 ‘아무나 와라’라는 식의 공고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은 기본상식이어야 한다. 저녁 6시에 마감하는 서류심사의 결과가 다음날 발표된다는 것은 그 옛날 전설 속의 대학교수처럼 선풍기에 대고 답안지 날려 멀리 나가는 순으로 점수를 매기는 것이거나,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뽑을 생각 없이 할리우드 액션만 취하는 것이거나, 이도 저도 아니면 “어차피 한 번 쓰고 버릴 것 선착순으로 뽑겠다”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아무리 철밥통 차고 놀고 먹는 교수들이 얄밉다 하더라도, 비정년·강의전담·연구 따위의 어지러운 수식어를 붙여 가며 인건비 아끼고 교수충원율 채우며 눈가림하는 행태가 합리화되어서는 안 된다.


결국 힘없는 놈이 참아야 하나

가끔 들리는 교수지망생들이 모여드는 인터넷 사이트 게시판에 올라오는 울분과 냉소의 글들을 읽기 전까지는 부끄럽게도 나는 이런 사실에 대해 알지도 못했고, 솔직히 말하자면 별로 알 필요도 없는 ‘정규직’이었다. 다 같이 지원하지 말자는 격정의 토로 한 켠에 그래도 답답하니 지원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라는 현실론, 마침내 청와대나 교육부에 투서라도 하자는 선동(?)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며칠 지나 게시판에서 이내 그 사건은 잊혀진 듯하다.

결국 힘없는 놈이 참아야 한다는 체념의 미학일까? 비슷한 종류의 횡포나 비리가 있을 때, 대개 피해당사자들은 일말의 희망과 원망이 뒤섞인 문으로 교육부를 바라보다가 결국엔 체념의 몸짓으로 돌아선다.

나는 문득 이득을 얻기 위해 미성년자를 고용한 이보다 먹고 살기 위해 고용당한 미성년자가 더 심한 처벌을 받았다던 산업자본주의 초기의 일화를 떠올린다. 그 어떤 시장도 최소한의 게임의 룰이 집행되고 최소한의 인권이 보장되는 장(場)이 되기 위해서는 제도적 장치의 마련과 집행이 뒷받침되어 한다는 경험적·이론적으로 분명한 사실이 잊혀지고, 갖은 종류의 폭력이 ‘시장’의 이름으로 미화되는 현실을 떠올린다.

누구 말마따나 “잘 몰라서 용감한” 이들의 명부에 이름을 올려놓을지언정, ‘중견대학’으로서의 지위를 남용하여 ‘남아도는’ 고급인력들을 우롱하는 얼토당토 않는 채용공고를 감시하고 견제하는 것 정도는 교육부나 정부가 해야 할 최소한의 일이라는 점만은 지적해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 류동민 교수 :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필자는 경제 및 사회현실에 광범위한 사회 현상에 대한 활발한 글쓰기를 하고 있다.

출처 : 국정브리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