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캔들하면 연예인이나 권력자들이 떠오른다. 일반인이 누구와 사랑을
나누던지 헤어지던지 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되지 않지만 유명인이 사랑
을 하거나 불륜을 저지르면 사람들은 마치 자신만이 세상의 모든 규범을
지키는 고고한 인물이라도 된 듯 다른 사람의 스캔들을 얘기하며 떠들어
댄다. 결국 피해를 보는 쪽은 스캔들로 자신의 명예가 회손 된 쪽이 아닐
까? 유명하면 사랑도 제대로 못하는 건지... 유명인들은 이름값을 단단
히 치룬다. 그밖에 스캔들에 얽힌 사건들은 무수히 많은데 수많은 남성들
과 간통한 희대의 스캔들 주인공인 어우동 사건은 어우동의 출신과 그녀
와 같이 성관계를 갖은 사람들이 유명한 사람들이어서 스캔들이란 명분
이 있었다.
어우동은 승문원 지사 박윤창의 딸로 왕가의 종친인 태강수 이동과 결혼
했다. 원래 행실이 바르지 못한 여인은 아니었다고 한다. 어느 날 태강수
가 은장이를 불러 은그릇을 만들라 하였는데 은장이에게 호감을 갖은 어
우동이 여종의 옷으로 갈아입고 나와 은장이와 희희덕 거리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고 화가 난 남편에게 내쫓겼다. 남편에게 소박을 맞은 어
우동이 친정집에 머무르고 있을 때 여종이 그녀를 꼬드기었다. 남편에게
쫓겨나 외로이 정절을 지키고 살아 본들 남편이 받아 줄 것도 아니고 억
울하게 사느니 즐기는 게 어떻겠냐며 바람을 넣어 오종년이란 사람을 소
개했다. 이것을 시작으로 어우동의 잠재된 욕망은 걷잡을 수 없는 쾌락
의 노름으로 타락했다. 다른 사내와 정사를 나눈 어우동은 이를 계기로
남자를 유혹하는 요부로 변하기 시작했고 이는 남편에게 버림받고 의미
없는 생활을 하던 여인에게 신선노름이나 다름없었다. 점점 그 수위를 더
해 버림받고 사느니 다른 사내와 실컷 즐기고 싶어진 어우동은 방산수,
수산수를 비롯하여 내금위 구전, 생원 서리, 종 등 고위관직의 관리와 미
천한 종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음란한 욕정을 채우며 비극적 운명으로 치
닫고 있었다. 이런 음란한 행동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당시의 사회적 규범
에 비추어 지탄을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성종 11년 왕과 대신들
은 방종한 행위를 일삼은 어우동을 극형에 처했다. 어우동의 정욕을 채우
던 쾌락들이 싸늘한 죽음으로 이어지게 되었지만 어우동과 힘께 음란한
행각을 벌인 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방산수와 수산수는 왕의 종친이어
서 처벌을 받지 않았고 그 밖의 고의관직에 있는 사람들은 관직을 삭탈하
고 지방으로 유배를 보내는데 그치고 말았다 한다.
음녀로 역사에 기록된 어우동의 사형에 비하면 너무나 가벼운 형벌이란
생각이 든다. 성적 억압이 강했던 조선시대에 어우동의 성적 욕망의 표출
은 성적 자유가 제한된 시대의 남성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과감했으며 남
편이 바람을 피우고 첩을 두어도 말 한번 못하고 질투하고 투기하는 것
이 여인의 고고함에 먹칠하는 처신으로 간주되던 시대에 어우동의 처벌
은 음란한 여인의 본보기였다. 조선시대는 축첩제와 기생제도가 존재하
던 시대로 성적욕망은 남성에게만 편중된 시기였다 볼 수 있다. 보편적으
로 여성이 남성에 비해 성적 욕구가 더 강하지만 성적 욕구가 강한 여성
들이 살기 어려웠던 시대의 스캔들은 아직도 소설과 영화를 통해 만들어
지고 있다. 마치 여인의 욕망을 대변하듯이...
출처 : <남녀의 성과 사랑> - LJ 비뇨기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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