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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DJ의 항변에는 이유가 있다.2005-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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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욱 칼럼] '한국적 법치주의'와 가장 원초적인 권리

파일 정국이 가히 복마전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이 복마전에서 국가정보원이 지난 5일 발표한 과거 불법감청 실태보고에 대한 기자회견문과 김승규 원장이 같은 날 발표한 대국민사과는 또 하나의 분수령이 되었다. 분수령이란, 이날 이후 미디어의 주된 관심이 김대중 정부의 불법도청문제로 옮겨졌다는 의미다. 미디어로서는 새로운 소재이므로 새로운 관심이 있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관심의 방향이 대단히 선정적이다.

미디어의 주된 관심은 실태보고서가 말하는 대로 DJ가 줄곧 자신이 "정치사찰과 도청의 최대 피해자"임을 강조하면서 누차 "반드시 없애라"고 지시한데 있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 도청을 어렵게 근절한 것이 김대중 정부의 업적이라는 걸 강조하는 데 있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어떻게 해서 이러한 지시가 4년간이나 묵살되다 2002년에 가서야 근절될 수 있었는지 그 불법적 메커니즘에 대한 관심도 아니었다. 그 선정적 관심은 'DJ, 과연 몰랐을까'다.

미디어의 관심

<중앙일보>는 그 선정적 관심의 대표선수다. DJ가 알았든 몰랐든 X파일의 진정한 주인공 홍석현 사장을 모신 바 있는 <중앙일보>는 이 사안에 대해 별로 할 말이 없을 것으로 생각하는 극히 상식적인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다. 이 신문은 8월 10일자 사설을 통해 DJ측의 음모ㆍ음해론을 경계하며 이렇게 입바른 소리를 한다.

"지금은 불법 도청 문제에 대한 해명과 사과부터 하는 것이 순서요, 국민에 대한 도리라고 본다. 김 대통령 측은 불법 도청 사실이 있었더라도 당시 대통령은 몰랐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모양이나 이 또한 납득하기 어렵다. 정말 몰랐다면 이는 국가 운영을 책임진 대통령으로서 중대한 과실에 해당된다."

물론 대통령을 이건희 회장으로 바꾸고 불법도청 사실을 불법뇌물공여 사실로 바꾸면 훨씬 더 좋을 문장이기는 하다. 그러나 어쨌든 외견상 틀린 말은 아니다. 그래서 DJ측 최경환 비서관은 실제로 지난 5일 보도자료를 통해 "김 전 대통령의 의지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부 불법행위가 있었다면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며 앞으로 조사를 지켜보겠다"고 전언하기도 했다.

자, 그러면 차분히 지켜보면 될 일이지 무엇이 문제였을까? 이후 바뀐 분위기 속에서 "김 전 대통령은 과거 안기부 '미림'팀의 불법도청은 흐지부지되고, 불법도청의 책임을 왜 '국민의 정부'가 다 뒤집어쓰고 있는지 참으로 표현하기 어렵고 난감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는 최경환 비서관의 전언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곳저곳의 미디어는 이런 DJ의 태도를 고깝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 예컨대 지금 엄청난 범죄 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범죄 혐의에 대해 무언가 한마디 변명(?)하려는 것조차 듣기 거북해하며 '근신하라'는 식의 훈시가 난무하는 상황이다. 나는 얼핏 누구나 인정할 만한 상식을 전제하는 이런 식의 미디어 태도에서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견고한 이데올로기적 관습을 읽는다.

생각해보라. DJ는 대북특검이라는 뼈에 사무치는 사건을 앞에 두고서도 제대로 된 항변 한 번 하지 못했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노벨상 수상자인 '인권 대통령'에 대한 예우? 지금도 DJ를 향해 '서울대 출신이 그것도 못해?'라는 식의 역차별적 조롱만이 난무하고 있다.

DJ의 피해의식

DJ는 지금까지 평생을 '더 잘하지 않으면 더 당하는', '더 잘해도 완벽하지 않으면 혼자 당하는' 이데올로기 속에서 투쟁하며 살아야 했다. 이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피곤하며 사람을 탈진하게 하는 것인지 마초들에 둘러싸인 여성들은 잘 알 것이다.

DJ는 지금 막다른 골목에서 모든 것을 국민들의 평가에 맡겨두고 스스로 자기변호를 포기할 경우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DJ가 모든 걸 뒤집어 쓸 가능성에 대해 우리 모두 '한국적 법치주의' 상황을 머릿속 깊이 유념하고 미래의 일을 한번 예단해보자.

지금 야4당이 공동발의한 특검법의 수사대상은 김영삼 정부와 김대중 정부, 그리고 현재까지의 노무현 정부의 불법도청과 그 내용 중 실정법 위반사항이다. 그런데 김영삼 정권 때의 '미림팀' 등 불법도청 관계자들은 공소시효 문제로 사법 처리될 가능성이 사실상 전무하다.

그리고 노무현 정부의 일은 현정권일 뿐만 아니라 국정원이 부인하고 있는 만큼 불법행위가 입증될 가능성 역시 거의 없다. 그리고 테이프 속 '말'의 주인공들은 공소시효도 문제거니와 부정하면 그뿐이다. 특검수사가 아닌 검찰수사여도 거의 마찬가지다. 자, 그렇다면 남은 할 일은 뭔가?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2003년 3월 국무위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북송금 특검을 받아들여 박지원 전 문화관광부 장관 등 핵심 측근들이 줄줄이 사법처리 됐던 '악몽'이 재현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즉 공소시효를 이유로 김영삼 정부라는 머리를 떼고, 불법을 부정하는 노무현 정부라는 꼬리를 떼고, 테이프 속 주인공들의 오리발을 빼고 나면, 남는 몸통은 자연히 국정원 스스로 그 죄를 순순히 인정한 김대중 정부의 불법행위다.

이것 떼고, 저것 떼고... 뭐가 남을까

자, 이쯤 되면 당연히 나와야 할 이데올로기가 있을 것이다. "그거야 조금이라도 잘못이 있고 그 잘못에 대해 '법대로!' 한 이상 억울해도 어쩔 수 없는 사건의 경과 아닌가? 이 땅의 법치주의를 위해서!" 그래서 말한다. 이것이야말로 두말이 필요 없는 '한국적 법치주의' 이데올로기다.

대한민국이 언제부터 그렇게 철저하게 법치주의를 숭상했는가? 안병욱 교수는 지난 3일자 <한겨레> 기고문에서 당국과 보수세력을 향해 "법조문을 이용한 알량한 논리"를 경고한다. 여론이 불법 테이프의 공개를 명령하자 특별검사가 그 공개를 결정하는 특검법을 만들어낸다. 그 내용 수사가 가능한 특검법이 통과되자 이에 맞서 검찰은 부랴부랴 '독수독과' 이론을 부정하는 법리를 금광에서 금맥 찾아내듯 찾아내 "법리상 문제없다"며 개가를 올린다.

나는 지금 여론이 짜증내는 법리얘기를 길게 할 생각이 없다. 나도 여론에 따르겠다. 그렇지만 한 가지 더 제안한다. 기왕 '한국적 법치주의'를 실현하는 김에 공소시효 소급연장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하라! 왜 안 되는가? 지난 1996년 헌법재판소는 전두환ㆍ노태우의 처벌을 위한 5ㆍ18 특별법 사건에서 완성된 공소시효의 소급연장이라고 보는 경우에도 위헌 정족수 6인에 미치지 못해 합헌이라는 판결을 내려준 적이 있다. 안 될 이유가 없다.

법리? 좋다, 까짓껏 하나 더 만들자

그런데 '한국적 법치주의'는 기존에 확립된 모든 법원칙을 민주주의의 압도적 힘으로 변경할 수 있다고 보면서도 공소시효 소급연장을 위한 특별법만은 결코 상상하지 못한다. 그리고 노무현 정부는 도청행위가 2002년 10월까지 지속되어 대선정보로 활용되었을 수도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은 깨끗하다며 특검법에 온몸으로 반대하고 있다. 나는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이런 불공평한 이데올로기적 상황이 남긴 '몸통' DJ의 피해의식과 자기변호는 '이유 있다'고 생각한다.

10일 DJ가 입원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홧병이 아니기를 바란다. 그리고 쾌유를 빈다. 하루빨리 일어나 마음껏 자기변호를 하기 바란다. 김영삼 정부의 1/100도 안되는 일이니 1/100만큼 책임을 질 것이며, 자신의 정부에서 비로소 도청 근절이라는 역사적 임무가 완수되었다고 변호하기 바란다. 이렇게 자기 스스로를 변호하는 일은 '한국적 법치주의'가 아닌 인류역사의 진보가 보장하는 가장 원초적인 권리임을 세상에 큰 목소리로 알리기를 바란다.


* 김욱 기자는 오마이뉴스 고정 칼럼니스트입니다. 서남대에서 헌법, 법철학 등을 강의하고 있는 헌법 학자입니다

출처 : Ohmy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