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나눔, 큰 사랑"
대구일중학교 교사 (국사) 박영숙
지금부터 약 20여 년 전 1980년대 초반 대구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중학교에 근무할 때의 일이다.
그 해의 2학기 마지막 날인 2월 28일은 토요일이었는데, 오전 11시경 학교 서무실에서 다급한 전화 연락이 왔다.
우리 반 1번 이은숙 학생이 3,4기분 공납금을 미납한 상태로 연락이 끊겨서 오늘 12시까지 해결하지 못하면 제적시킬 수밖에 없다며,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묻는 전화였다.
그 학생의 2학년 담임을 끝내고 3학년 진급을 앞둔 봄방학 때였다.
나는 해결책이 있는지 반문하였고, 서무직원은 미안한 목소리로, 방법이 있긴 하지만… 하면서 어렵게 말을 꺼냈다.
“선생님께서 다음 봉급에 제하라시면 마침 서무직원이 지금 은행에 가 있으므로 해결할 수 있는데요”
하는 것이었다.
나는 선뜻 그렇게 해달라는 부탁을 해놓고, 다음날 아침 학생 집 주소를 보고 물어물어 찾아갔다.
어렵게 찾아간 골목 안 집 대문으로 들어가 보니 마침 은숙이가 자기 몸집보다 3배나 더 큰 쓰레기통을 들고 쓰레기차에 버리기 위해 나오는 참이었다.
나를 보더니 순간 놀라며 반가움에
“선생님!”
하고 뛰어왔다.
쓰레기통이 큰 이유는 부모가 단칸 셋방에 살므로 주인집 할머니 방에 잠자는 대신 집안 전체 청소와 쓰레기통 비우기를 도맡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2월에는 아프다며 거의 결석을 했기에 이유도 확실하게 알아볼 겸 부모님을 찾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자리를 피하시고, 큰방 할머니를 통해 새엄마에게 온갖 구박 속에서 사람대접을 못 받고 있다는 딱한 사정 이야기를 조금 들을 수 있었다.
나는 그 애의 아버지를 만나 다시 자초지종 이야기를 들었다. 아버지는 자가용 운전기사였었는데 얼마 전 교통사고를 내서 직장도 잃고, 다친 후 치료 및 합의금 지급 등의 문제로 너무나 상황이 어려워 집에서 쉬고 있는 중이었다. 벌이가 없어 생계가 어려워지자, 은숙이 학교를 그만두게 하고 돈 벌러 깊은 산속에 송이버섯이나 캐러 가자고 엄마가 설득시키는 중인 것 같았다.
우리 반 1번인 이 학생은 조그만 체구에 말이 없고 너무나 착하고 얌전한 학생이었는데… 이렇게 딱한 형편인 줄 몰랐다는 사실에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주인집 할머니는 은숙이에게 부모처럼 잘 해 주라고 거듭 부탁을 하셨다. 나는 그 순간 누군가에게 명령이라도 받은 듯 불쑥 그의 아버지에게
“은숙이를 제가 저의 집에 데리고 가도 되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기다리기라도 한 듯 아버지는
“선생님 고맙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은숙이 때문에 부부 간에 불화가 잦아서 늘 부부싸움을 밥 먹듯이 한다는 할머니 얘기가 떠올랐다.
은숙이도 나를 따라 오면서 너무나 좋아했으며 이때부터 우리 집에서 3학년을 마치고 졸업하였고, 제일여상에 입학하여 3년간 학업을 마친 후 세무사사무실 취업과 동시에 야간부 계명대 의상학과에 진학하면서 우리 집에서 독립해 나갔다.
우리 집에 데려 왔을 때 우리 애들 삼남매의 나이는 11살, 8살, 6살로 처음 은숙이를 보고 “언니야” 하며 아주 좋아했다.
남편은 그냥 덤덤하게
“사전에 한 마디 말이라도 했었어야지, 그래! 어쨌든 잘 했다”
하는 정도였고, 나는 너무 즉흥적으로 행동했던 나 자신의 태도에 미안해하며
“나는 물론 당신이 무조건 좋다고 할 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며 얼버무리고 그냥 넘어갔다. 아마도 너무나 황당한, 한 마디 의논도 없이 행한 날벼락 같은 내 행동에 기가 막혔으리라.
그러던 며칠 후 하루는 아이 아빠가 화난 얼굴로
“아~이구, 게을러빠진 모습 차마 못 봐 주겠더라. 자기가 쓰는 방을 닦는데 무심코 들여다보니 한 손은 배를 움켜쥐고 한 쪽은 엎드려 뻗쳤다가 한참 후 슬며시 떼고 또 한쪽 손으로 엎드린 채 한참 있다가 슬그머니 떼고 정말 하기 싫어 죽는 듯한 모습이라니…….”
하는 것이었다. 내 눈에는 그런 모습 안 보였기에 그럴 리가 없는데 하고 생각했다.
나는 그날 밤 그 애 방에 가서 솔직히 말해달라고 사정사정 했다. 그랬더니 울먹이며 한참 후 하는 말이 너무나 괴롭고 정말 죽고만 싶은 나머지, 우리 집에 오기 며칠 전에 하이타이 가루세제를 물에 타서 마셨다는 것이다.
토하고 또 마시고 토하고 했다는 그의 말을 듣고 나는 은숙이를 붙들고 한 참을 같이 울었다.
어린 마음에 아프다고 하면 혹 돌려보내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고, 오자마자 아프다고 하면 병원비는 물론이고, 걱정까지 끼치게 되니 미안함 때문에 절대로 아픈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지내려했던 것이리라. 그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남편도 그 일이 있은 이후로 아이를 애틋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그 당시 사대부고 여교사 2명과 사대부중 여교사 4명 등 6명이 부속중고등 전체 여교사였고 매우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기에 이 이야기를 학교에 가서 했다. 그랬더니 마침 사대부고 여선생님 남편인 소아과 의사께서 기꺼이 치료를 해주시겠다며 너무나 고맙게도 애를 보내라고 하셨다. 다 나을 때까지 장기간 정성이 넘치는 치료를 해 주셨는데 그 장소는 북비산 로터리에 위치한 “조 소아과”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위속이 헐어서 밥을 못 먹은 사정을 알고 난 후, 나는 영양실조로 바짝 마르고, 키도 자라지 못한 듯한 은숙이가 너무나도 애처로웠다. 그래서 이를 막으려고 흰죽, 소고기를 갈아서 쑨 죽, 야채죽 등 여러 가지 죽을 번갈아 쑤어 보온병에 담아 학교 양호실에서 먹이며 치료를 계속했다.
착한 은숙이도 학교 마치면 집에 돌아와 동생들 돌보며 집안일도 도우려고 애쓰고 우리 가족은 아주 화목한 나날을 보냈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부터인가 반상회에 참석하면 수군거리다가 나를 보고는 멈칫 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별 의심 없이 돌아오곤 했었는데, 하루는 큰아들 친구 엄마가 할 말 있다며 부르더니 대뜸 그 집 여학생 누구냐고 물었다. 내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자, 그는 듣고 난 후 갑자기 폭소를 터트리는 것이다.
부부교사인 우리는 우리 꼬마 6살짜리 때문에 아빠가 제일여상 야간부를 지원해서 오후 4시에 출근하는데다, 집도 학교와 가까웠다. 그러다보니 오전 10시 쓰레기차가 오면 당연히 아빠의 몫이 되었고 우리 꼬마와도 손잡고 놀이터에서 놀아 주니 실업자로 착각했던 모양이다. 거기다가 우리 꼬마는 물론 애들 모두가 언니야 ! 언니야! 하며 잘 따르니 이를 보고
“백수인 주제에 어디서 딸까지 낳아 데려다 키운다”
“거기다가 학교까지 보낸다”
“여선생님만 불쌍하다”
고들 했다는 것이었다.
그 이후 우리 남편은 뜻하지도 않았던 아파트 관리위원장으로 만장일치로 추대 받아 꼼꼼하게 살림 잘 하는 존경받는 위원장으로 장기간 붙잡히게 되었다 .
또 한번은 집에 가니, 은숙이가 울어서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이유를 물으니 은숙이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만 하였다. 나는 우리 애들 셋을 불러 앉혀 놓고 타이르듯이 물었다 그랬더니,
“엄마, 사실은 엄마가 언니야만 맛있는 죽 쑤어주고, 또 언니야 옷만 사주 고 우리 것은 안 사주기에…….”
하는 것이다
“엄마가 언니야 옷 사느라고 우리 옷 못 샀잖아”
하며 우리 꼬마가 질투가 나서 언니한테 따지며 대든 모양이었다. 우리 애들은 절대 그런 말 하지 않을 줄 알았었는데 애들은 다 똑같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용돈을 나눠 주면서
“너희들은 옷도 많고 헌 옷도 받아 입을 수 있지만 언니는 제일 크니까 물려받을 옷이 없잖니, 그지? 언니 옷 작아지면 너희들이 받아 입으면 되고…….”
하며 욕심 부리면 하나님께서 미워하신다고 타이르듯이 간곡히 말하고 그리고 언니가 죽을 먹어야할 이유를 자세히 설명해 주었더니 그제야 아이들은 울먹이며
“언니야가 아픈 줄 몰랐어.”
하고 애틋해 하며 사랑으로 언니를 따르게 되었고, 또 언니도 동생들에게 사랑으로 극진히 대해 주었기 때문에,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 그 전보다 사이가 더욱 좋아졌고 이후 그런 문제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어느덧 고교 입학원서 접수 철이 돌아왔다.
여상에 입학시켜 직장 생활을 하도록 해야겠기에 학교 생활 지도며 학업에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줄 수 있도록 남편이 근무하시는 제일여상에 원서 내는 것이 좋겠다는 방향으로 의견을 모았다.
제일여상은 대구에서 가장 성적이 높은 학교이므로 이름난 학교를 졸업해야 취직에 유리하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