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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법 앞의 불평등(2)2005-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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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호성 교수 상식론> 법 앞의 불평등(2)


찌는 듯한 더위가 계속되는 가운데 국회의원, 판·검사, 기자 등 이른바 ‘사회 권력층’ 인사들의 ‘음주사고’가 잇따르고 있다.

지난 23일 새벽 0시35분께 청주 지방법원에 근무하는 이모 판사는 만취상태에서 택시를 훔쳐 고속도로를 질주하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한다. 무려 10여 킬로를 달아나다 경찰에 붙잡힌 이 판사는 0.19 %의 혈중 알콜농도를 기록해, 절도와 음주운전 등의 혐의로 입건됐다는 것이다.

어떤 네티즌은 특히 판사의 택시 절도 및 만취운전에 대해 “사회 공헌도가 크다는 이유로 불구속 수사와 가벼운 집행유예를 내릴 것”이라며, ‘봐주기’ 판결을 예상하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또 어느 네티즌은 이 판사를 ‘카트라이더(자동차경주 게임) 판사’로 명명하며 “일반인과 같은 잣대로 판결하기 바란다”는 당부도 덧부친 적이 있다. 이런 현상들은 사실 법이 공정하게 집행되지 못하고 있는 우리 현실을 바라보는 소박한 민심의 시선이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이 이 판사가 선고한 판결도 적잖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판사가 내린 언도라는 게 과연 얼마나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일까 ….

토끼의 법

사실 우리 사회에는 법의 공정한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들이 적잖다. 방귀 한번 마음 놓고 뀌어보지도 못한 서민들이 옥에 갇혀 처형됐다면, 그 가족들은 과연 어떤 고난을 겪어야 했을까?

가령 2차 ‘인민 혁명당 사건’의 피해자 가족들이 겪은 쓰라린 체험담은 눈물과 통한 없이는 들을 수 없을 지경이다. 동네 아이들이 간첩의 자식이라고 욕을 해대며, 아이의 목에 새끼줄을 걸어놓고 끌고 다니기도 했다는 처절한 쓰라림은 과연 언제나 치유될 수 있을까.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기록된 그 날의 대법원 확정 판결 이후 벌써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현재 인혁당 사건의 재심 여부를 따지는 심리가 다시 시작되었다 한다. 간첩죄로 무기형을 선고받았다가 최근 재심에서 무죄로 확정된 함주명씨 사례도 있으니 희망을 잃지 않아야 한다. 이 세상에 희망 없는 일은 없고, 다만 희망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만 있을 따름이다.

그런데 우리 대법원의 실상은 과연 어떤 수준일까. 물론 기이하게 사건을 처리함으로써 절묘한 모범을 보여준 희한한 판결 사례도 없지는 않다. 예컨대 어느 해고 노동자의 대법원 복직 판결은 무려 41 개월이나 걸렸으나 국가보안법 사건에서 무죄를 깨고 그것을 유죄로 뒤집는 판결은 엄청나게 기민하게 처리되어 겨우 6 개월 정도밖에 소요되지 않을 정도였다는 보도도 있었다.

한겨레신문에 따르면 1·2심에서 모두 승소하고도 3년 5 개월 동안이나 대법원이 사건 처리를 지연하는 바람에 가슴 태워야 했던 한 노동자가 마침내 지난 22일 최종 복직 판결을 받아내었다 한다. 판결 직후 현대 미포조선 해고자 김석진씨는 “대법원이라는 절벽을 만났었는데 이제 암흑 속에서 빛을 찾은 기분입니다”라고 환호했다고 전한다. 그는 대법원을 한마디로 “절벽”이라 규정한 것이다.

아무튼 해고된 때로부터는 8년 3 개월 여 만이다. 대법원 3부(주심 양승태 대법관)는 “김씨가 17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근무한 점, 징계에 이른 행위가 근속한 사람과의 근로관계를 당장 단절한 만큼 신뢰관계를 해할 정도까지는 못 미친다는 점을 감안한다”고 원고 승소 이유를 밝혔다. 이로써 김씨는 부당 해고 기간의 미지급 임금(지연이자 포함)으로 3억 4400 여 만원을 받게 됐다 한다.

그는 대법원 판결로 그렇게 소망했던 일터로 돌아가게 됐지만, 그가 8년이라는 해고생활 동안 겪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어머니를 잃은 것 외에도 복직을 위해 송사에 쫓겨다니느라 거액의 빚을 지기도 했다. 회사 앞에서 벌인 43일 동안의 단식과 180일 동안의 밤샘노숙으로 얻은 관절염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해 달리기조차 못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오만한 대법원의 판결 행태에 저항해 또다시 올곧은 전의를 불태우고 있다. 그는 “민사소송법 199조에는 대법원 상고심의 경우 통상 다섯 달 안에 판결하도록 하고 있으나 대법원이 이를 지키지 않아 이중의 고통을 줬다”며 “이번 일처럼 뚜렷한 이유 없이 재판 지연으로 피해를 보는 해고자가 생기지 않도록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처럼 김석진씨에게 복직 판결을 내리는 데 무려 40 개월을 고심한 대법원은, 국가보안법 사건을 ‘무죄’에서 ‘유죄’로 뒤집는 데에는 불과 6 개월 여 밖에 소모하지 않는 탄복할만하게 기민한 ‘속도전’을 과시한 적도 있다.

대법원 3부(주심 이용우 대법관)는 지난 22일, 이른바 ‘아주대 자주대오’라는 주사파 지하조직에 가입한 혐의(국가보안법 위반)로 구속 기소된 최 아무개(27)씨에게 무죄가 선고된 원심을 깨고 유죄 취지로 사건을 서울고법에 돌려보냈다.

최씨는 ‘아주대 자주대오’에 가입한 혐의 등으로 2001년 구속 기소됐지만 지난해 12월 항소심에서 ‘아주대 자주대오’라는 조직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인정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이적단체 가입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당시 이 판결은 각 대학에서 터진 ‘자주대오’ 조직사건 가운데 첫 무죄 판결이었다는 점에서, 세인의 지대한 관심을 끌기도 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이번 판결의 주심이 지난해 정치권에서 논의중인 국가보안법 폐지론을 정면 반박하고 나섰던 이용우 대법관이라는 점을 들어 ‘신속한’ 판결에 대해 곱지 않은 눈길을 보내고 있다. 대법원은 국가보안법 개폐 논란이 거세던 지난해 9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전 한총련 대의원 2명의 상고심에서 징역 2년 6월의 원심을 확정하면서 “오늘날 북한에 동조하는 세력이 늘어가고 통일전선의 형성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스스로 일방적인 무장해제를 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고 강조해 파문을 일으켰다. 한 법조계 인사는 “당시 주심으로 ‘국가보안법 옹호’에 목소리를 높였던 이용우 대법관이 오는 10월 퇴임을 앞두고, ‘자기 손’으로 사건을 처리하고 가겠다는 의중이 반영된 것 아니겠냐”는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례들을 목격하면서, 우리는 과연 ‘법 앞의 평등’을 외쳐댈 수 있는 것일까?

인간의 법

무엇보다 이 ‘법 앞의 평등’ 원리는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가치 중 하나인, 이른바 ‘기회균등의 원칙’에 뿌리내리고 있다. 왜냐하면 ‘기회의 균등’ 원칙은 특권적인 귀족계급에 대항하여 시민계급이 앞세울 수 있었던 가장 호소력 있는 정당화 논리로서 가장 먼저 법에 의해 튼튼히 다짐을 받았기 때문이다. 즉 ‘법 앞의 평등’은 ‘기회균등’의 필요조건이요, 충분조건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이러한 기회균등의 이데올로기가 그토록 공정한 것으로 비칠까?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운명이 그를 둘러싸고 있는 객관적 환경이 아니라 스스로의 선택과 능력에 의해 결정되어진다고 역설하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이 기회의 균등이 인정된 사회 안에서 나의 개인적인 야심을 추구하려 한다면 나의 성공이나 실패 여부는 내가 속해 있는 계급, 성, 지역 등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의 개인적 자질에 의해 판가름 난다고 여겨진다.

한국 같은 이른바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어느 누구도 그의 사회적 환경에 의해 특권을 누리거나 손실을 당하지 않도록 법적인 장치가 마련되어 있다. 그런 탓에 우리의 성공 또는 실패는 우리 자신의 선택과 노력의 결과로 이해될 뿐이다.

기회의 균등이 주어져 있는 사회에서는, 예컨대 불평등한 소득 역시 공정한 것이 된다. 왜냐하면 성공은 ‘능력 있는’ 자에 속하는 것이고 또 그것을 ‘가질만한 자격이 있는’ 자에게 돌아가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모든 책임은 사회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 스스로가 떠맡아야 하는 것이 된다. 국가와 사회는 원칙적으로 사회적 불평등을 도려낼 아무런 의무를 갖지 않는다.

재능 있는 사람들만 각광을 받고 또 그들만을 위해 자유경쟁이 허용되어진다면, 사회적 불평등의 골이 더욱 깊어질 것은 명확한 일이다. 경주에서 승리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경주로서의 값어치를 가진다. 한마디로 말해 이러한 기회균등의 원칙은 시장경제 원리 등이 속속들이 파고들어 있는 자유민주주의 체제, 그리하여 모든 인간관계를 경연으로만 간주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원리가 된다. 그러므로 그것은 “불평등해지기 위한 평등한 권리 및 기회”에 대한 요구일 따름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엄청난 불평등이 존재하는 사회를 정당화하기 위해” 활용될 수 있는 이념인 것이다.

이를테면 기회의 균등은 무엇보다 인간 사회에 존재하는 불평등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긴다. 왜냐하면 특히 각 개인이 지니고 있는 소질이나 재능이 결코 한결같지 않다고 믿을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한 불평등이 용인됨으로 해서 자유경쟁이 원천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구호는 대단히 보수적이다. ‘법 앞의 평등’ 원리도 크게 다를 바 없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나라 서민은 탁월한 정치철학자들이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이 구호야말로 ‘법 앞의 불평등’을 절규하는, 21세기 한국 서민의 가공할 정도의 뛰어난 정치철학인 것이다.

예를 들어 노벨상까지 탄 프랑스의 소설가 아나톨 프랑스는 “법은 장엄한 평등을 구가하면서 가난한 사람뿐만 아니라 부자에게도 다리 밑에서 자고, 거리에서 구걸하고, 빵을 훔치는 것을 금하고 있다”는 경구를 날렸다. 이를테면 법이야말로 정의롭게도 부자와 가난뱅이를 평등하게 처벌한다는 야유인 것이다. 그리고 어떤 철학자는 “법이란 평등한 잣대로 불평등한 인간을 재는 모순적인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그리고 누가 법을 만드는가? 예컨대 가난한 사람들이 과연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돈의 힘으로 의원이 된 사람들이 과연 가진 게 없는 자들을 위한 법을 만드는데 앞장서고자 할까? 가령 재벌 총수와 달동네 노동자가 나란히 법정에 선다면 과연 동등한 대접을 기대할 수 있을까?

1999년 1월 터져 나온 이른바 ‘대전 법조 비리사건’에 즈음하여 실시한 한 일간신문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모든 국민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견해에 대해 국민 71.4%가 동의하지 않는다고 응답했다 한다(세계일보, 1999.2.4일자).

최근 불거진 불법 도청테이프에 대한 사법 처리는 과연 어떻게 이루어질까? 그것은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정신의 하나인 ‘법 앞의 평등’ 원리를 측정하는 리트머스 시험지 역할을 할 것이다.

말하자면 ‘대한민국은 과연 자유민주주의 국가인가?’ 하는 준엄한 역사적 물음이 바로 이 도청테이프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끝)

◎ 박호성 교수
서강대 정치학과 교수. 사회과학대학 학장 겸 공공정책 대학원 원장으로 재직중이며 정치사상을 전공했다.

출처 : 국정브리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