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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삼성 공화국’과 자유민주주의(1)2005-07-27
작성자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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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호성의 상식론 칼럼
국민은 삼성을 자랑스러워한다. 그러나 동시에 두려워하기도 한다. 여기저기서 ‘삼성 공화국’이라는 자조 섞인 칭송도 들려온다.

어쨌든 삼성을 바라보는 국민의 시각은 다분히 이중적이다. 그 평가도 명암(明暗)이 엇갈린다. 한편으로는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한 삼성에 대한 자부심과 기대가 깔려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삼성의 지배구조와 노사문제, 경영권 변칙 승계,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엄청난 비중, 한국사회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행사하는 막강한 영향력 등을 우려하는 시각이 병존한다.

얼마 전 민주당 김종인 의원은 삼성생명 등이 낸 공정거래법 헌법소원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언젠가는 삼성과 같은 재벌이 국가권력에 정면 도전하는 일이 올 것으로 생각했다”고 단언했다.


재벌,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여론몰이

김 의원은 “처음엔 국가권력이 일방적인 우위를 점하지만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경제권력이 성장해 대등해지는 경향이 있다”며 “삼성의 헌소 제기와 같은 재벌의 국가권력 도전은 예상보다 일찍 이뤄졌다”고 말했다. 동시에 그는 “재벌은 지금 경제적 힘 뿐 아니라 광고를 통해 언론사를 동원하고 자신들에 동조하는 전문가집단을 만들어 사회여론을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몰아가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삼성과 국가권력 상호간에 빚어지는 이러한 갈등 현상을 바라보면서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자유민주주의와 대기업이 어떠한 상관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는 것을 따져보는 것은 나름대로 대단히 의미 있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자유민주주의의 특성>

자유민주주의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물리적 결합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민주주의를 흡수한 자유주의다. 자유주의적 요소야말로 알파와 오메가인 것이다. 요컨대 자유주의가 주도자라면 민주주의는 수행비서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주의의 구미와 취향에 어울리는 민주주의적 요소만이 간택의 대상이 되었다. 즉 자유의 숭고한 목표에 충실한 수단으로서의 민주주의, 무엇보다 사유재산의 철칙과 권위를 결코 무엄하게 넘보지 않는, 잘 길들여진 러닝메이트로서의 민주주의가 자유민주주의의 참다운 본새인 것이다. 말하자면 자유민주주의는 자유주의가 민주주의를 흡수 통일함으로써 성립하게 된 체제라는 말이다.

19세기는 실로 자유주의의 세기였다. 자유주의는 ‘산업주의의 예언자’요, 자유무역의 건설자였다. 영국을 세계의 공장으로 만들었으며 지상의 외톨이로 숨어 있던 나라와 민족들의 고립까지 속속들이 파괴해버린 세계시장의 창조자였다. 그것은 ‘종교적 관용의 변호인’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는 의회주의와 보통선거권을 거의 자연법의 원칙으로까지 승화시켜 놓았다.

굳이 소련 및 동유럽 공산권의 몰락을 예로 끄집어내지 않더라도 자유주의의 줄기찬 생명력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저 18세기 말 이래의 혹독한 혁명들에 단련되어서일까, 자유주의는 자신의 목덜미에 겨누어진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군의 예리한 비수라든가 또는 파시즘의 소름끼치는 암살음모, 이런 것들을 하나씩 너끈히 해치우고는 이제는 ‘신자유주의’의 이름을 내걸면서까지 거의 홀로 푸르름을 구가하는 듯하다.

자유주의는 지난 4세기 동안 서구 문명의 두드러진 교리였다. 어느 누구도 자유주의의 이 길고 오랜 역사와 그 강인한 파급력을 결코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은 바야흐로 전 지구상에 이 자유주의의 물결이 가 닿지 않은 곳이 거의 없을 지경이다.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설파했던 “중국의 만리장성을 무너뜨리는 자본의 힘” 같은 것이 실은 이 자유주의의 힘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급기야는 저 모스크바의 크레믈린 궁전을 무너뜨려 공산권의 몰락을 부추기기도 했다.

그만큼 자유주의의 역사적 탄력성과 적응력이 뛰어나다는 말도 된다. 그것은 정치제도 및 경제활동의 기본원리일 뿐만 아니라 이제는 현대인의 자연스러운 사고방식이요 몸에 밴 생활습관의 한 가닥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태양이 높으면 그림자가 길듯이 자유주의 역시 적지 않은 오점으로 얼룩져 있다. 자유주의가 생겨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라는 강력한 경쟁세력과 맞부딪쳤던 점이라던가, 비인간적 산업화와 자본주의적 팽창과 착취 등이 다 이 자유주의의 이름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 등은 이러한 얼룩들의 실체를 웅변으로 말해준다.


법치주의와 대의정부 옹호하는 자유주의

그렇다면 도대체 어떠한 것이 자유주의인가, 그리고 자유주의를 자유주의답게 만드는 본질적 요소는 무엇인가.

첫째, 자유주의는 자본주의적 부르주아계급의 신념체계요 행동강령이다. 그것은 봉건적 특권계급의 전횡에 대항하는 떠오르는 시민계급의 저항 이념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강제로부터의 해방’을 지향하는 자유와 직결되어 있다. 그러나 시민계급이 추구했던 자유는 보호해야 할 재산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국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보편성의 자격’을 지니지는 못한다. ‘자유주의자의 신경중추는 돈지갑’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자계급의 이해관계와는 본래부터 인연을 멀리하였다.

둘째, 자유주의는 개인주의에 몸담고 있다. 봉건적 신분질서로부터의 개체의 해방을 기치로 내걸었던 부르주아지는 개인이야말로 자신의 이해관계를 가장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또 가장 잘 합리적으로 추구할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고 확신하였다. 따라서 자유주의는 애초부터 이러한 개인의 자유로운 정치-경제적 활동이 철저히 보장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역설하였던 것이다.

이런 뜻에서 국가의 역할과 기능을 최소한의 범주에 묶어두고자 했다. 그리하여 국가조차도 결코 침해할 수 없다고 선포한 인간의 기본적 권리의 체계를 만들어냈다. 재산권의 보호가 그 핵심을 차지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리고 이러한 여러 이해관계들을 수호하기 위해 자유주의는 법치주의와 대의정부를 옹호한다.

그러나 자유주의는 전통적으로 자유와 평등 사이의 대립성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유를 개성의 구현을 위한 필수품으로 간주하는 반면 평등은 개인적 자유에 침투해 들어오는 국가 또는 사회로부터의 부당한 간섭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가난이 덕망의 상징인 적이 있었다. 동양 세계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서양에서도, 예컨대 전통적인 기독교 윤리만 하더라도 청빈을 참된 삶의 징표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화려하게 막을 올린 이후로는 가난은 실패와 무능의 딱지로 따라 다녔다. 심지어 사회적 불안이 엄습할 때면 가난한 자는 오히려 사회에 대한 위협으로 낙인찍히기 일쑤였다.

자유주의적 사회질서와 자본주의 경제는 이러한 현상을 더욱 정교하게 정당화하는 논리체계를 만들어 내었다. 왜냐하면 가난은 사회가 아니라 개인의 책임이라는 것을 일깨워줌으로써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적 사회질서 자체가 지니고 있는 잘못을 꽁꽁 숨기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경쟁의 욕구를 줄기차게 부추기는 것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절실했기 때문이다.

점차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는 ‘시장 자유주의’(market liberalism)의 ‘가난’에 대한 전통적인 시각은 예를 들어 1700년대 초 유명한 ‘꿀벌의 우화’의 저자인 맨더빌(Bernard Mandeville)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이렇게 선언한다.

“노예가 허용되지 않는 자유로운 나라에서 가장 확실한 부(富)는 부지런히 일하는 수많은 가난뱅이에게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사회를 행복하게 하고 보잘것없는 환경 아래서나마 사람들을 편안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그들 대다수가 가난할 뿐만 아니라 무지해야 한다는 것은 필수적이다.”

사람들을 무식하게 키우는 것은 노동을 값싸게 만들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유익하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맨더빌의 모토는 “개인적 악덕이 곧 공적인 이득”(Private Vices, Public Benefits)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그 이후 알게 모르게 자유주의적 경제질서의 정신적 바탕이 되기도 했다.


아담 스미스, 이윤 지상주의적 정신 태도 경계

아담 스미스조차 사유재산이 필연적으로 불평등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음을 시인하면서, “한 사람의 큰 부자가 있기 위해 최소한 오백의 가난한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소수의 풍요는 다수의 빈곤을 가정한다”는 사실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이들 가난한 대중은 이러한 부의 불평등에 대해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되고, 따라서 ‘재산을 많이 모은 개인’을 이들로부터 보호해야 할 필요성이 자연스럽게 제기된다. ‘법과 정부’가 바로 이 역할을 떠맡는다.

그러나 그는 자본가의 역할에 대해서는 기꺼워하였으되, 그들의 이윤 지상주의적 정신 태도에 대해서는 달가워하지 않았다. 스미스는 “인류의 지배자도 아니고 되어서도 아니 될 상인과 공장주의 천박한 탐욕과 독점욕”을 사납게 꾸짖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팽창에 따른 빈부 격차의 심화를 체험한, ‘인구론’의 저자, 토마스 맬더스(Thomas Malthus)에 오게 되면 상황은 돌변하게 된다.

그는 소수에 의해 향유되는 부와 절대 다수가 겪고 있는 빈곤 사이에 파고든 갈등을 목격하고서는 이러한 상황이 방치되는 경우 중대한 파국을 맞게 되리라 경고했다. 식량공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반면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급증할 것이기 때문에 특히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빈곤 계층에 대한 다양한 통제, 예컨대 결혼연령이나 성욕, 출산 등에서의 효율적인 제재가 필수적이라 역설하였다. 말하자면 예상 가능한 사회적 위기의 근본적 원인을 사적 소유 그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그 필연적 부산물인 빈자들에게서 찾아내었던 것이다.

맬더스는 이렇게 외쳤다. “이미 소유된 세계에 태어난 사람은, 만약 그가 당연히 기댈 수 있는 자기 부모에게서 생존에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없고, 또한 사회가 그의 노동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빵 한 조각도 요구할 권리를 갖지 못한다. 그리고 그는 그가 있는 곳에 존재할 이유도 없다. 자연의 풍성한 잔칫상에는 그를 위해 마련된 자리가 없다. 자연은 그에게 떠날 것을 요구한다.”

사회적 소유 계급에 대해 이보다 더한 복음이 있겠는가. 이런 맬더스였으니 국가에 의한 빈민 구제사업을 철저히 반대하였음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우리는 여기서 빈곤 문제를 바라보는 가장 거친 자유주의적 시각의 하나와 마주친다. 비록 그것이 도덕적 호소에 그치긴 하였으되 아담 스미스에게서 찾아볼 수 있었던 인도주의적 배려나 전체 사회의 공공 복리에 대한 관심 같은 것은 맬더스에게서는 좀처럼 찾아볼 길이 없다. 그리고 이런 경향은 자본주의의 발달과 더불어 현실 정책의 차원에서도 더욱 강화된다.

예를 들어 1830-1940년대의 빈민법이나 아일랜드의 기근에 임하는 영국정부의 비인도적 태도를 눈여겨보면 자유주의 또한 스스로의 선언과는 달리 얼마나 독단적이고 비인간적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이 한결 또렷해진다. 말하자면 우리는 이러한 사례를 통해 자유주의적 경제원리를 좇은 국가정책이 얼마나 독단적이고 비인도적이었던가 하는 것을 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1834년에 만들어진 ‘신 빈민법’(New Poor Law)은 “노동이 부의 원천이듯이 가난은 노동의 원천이다. 가난을 추방하면 노동도 추방하는 것이 된다”는 자유주의의 정신적 신조에서 출발하여, 구빈원(workhouse or poorhouse)을 포함한 일체의 빈곤퇴치 정책을 반대하는 분위기 속에서 만들어졌다. 구빈원은 ‘바스티유 감옥’으로 인식될 정도로 빈민들의 ‘공포의 대상’이었고, ‘게으른 자에 대한 징벌’의 무시무시한 수단으로 이해되었다.

다른 한편 1845년 이후 수년 동안 아일랜드 전역을 휩쓴 역사적 대기근에 대처하는 영국 정부의 비인도적인 자세도 자유무역 원칙의 반영이었다.

영국 정부는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불개입주의에 의지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맬더스의 논리를 좇아 아일랜드의 ‘과다한 인구’를 이 기회에 정리함으로써 인구와 식량공급 간의 균형을 회복해야 한다는 논거를 따랐다. 결과는 150만에 달하는 아사자와 100여만에 이르는 이주자였다. 그러나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그 당시 아일랜드 문제를 비인도적으로 이끌어나간 영국 정부의 최고 책임자 중의 한 사람이 바로 평화주의자며 인도주의적 자유주의 철학자로 유명한 버트란트 럿셀의 할아버지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두 사람 다 자유주의자였다.

어쨌든 자유민주주의는, 물론 나라마다 조금씩 차이가 나긴 하지만 이러한 자유주의적 속성을 지배적으로 지니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여러 결함들을 지니고 있다. 이 문제점들과 이른바 ‘삼성 공화국’ 문제가 과연 어떠한 상관관계를 지니고 있을까? (계속)

◎ 박호성 교수
서강대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민주화기념사업회 연구소 소장을 지냈다.
출처:국정브리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