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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06 독일월드컵 기행2006-07-10
작성자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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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현지 적응

MBC해설위원 자격으로 독일 땅을 밟은 엠파스 토탈사커 편집장 서형욱이 독일 현지의 이야기를 가벼운 기행문 형식의 글에 서툰 사진을 담아 전해올 예정입니다. <엠파스 토탈사커 편집팀>

얼마나 잤을까. 너무 오래잔 것인지 몸이 무거워 퍼뜩 눈을 떴는데 여전히 깜깜하다. 몸을 일으키고 눈을 비비는데 같은 방을 쓰는 김창옥 부장(아나운서)가 커튼을 훽 열어젖힌다. 이내 방안을 메우는 눈부신 햇살. 하지만 얼굴 가득 내리쬐는 햇살도 잠을 앗아가진 못한다. 한참을 잔 것 같은데... 고작 새벽 5시라니. 맘이 놓인다. 왜 갑자기 이등병때 생각이 나는걸까. 기상 나팔 울리기 전에도 몇번씩 잠을 깨지만 시계를 보면 1~2시간 밖에 지나있지 않던 그 때의 기억. 시차때문일까, 아니면 월드컵 도시 뮌헨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긴장한 것일까. 잠시 볼일을 본 뒤 다시 침대에 누워 베개에 얼굴을 파묻는다. “일어나기 싫지?” 김 부장의 웃음 섞인 목소리를 뒤로 한 채 금세 깊은 잠에 빠져든다.

...

다시 눈을 뜨니 이제야 아침이다. 열두시간은 잔 것처럼 머리가 무겁지만 짙게 드리워진 커튼때문에 도무지 시간을 감잡을 수 없다. 시계를 보니 고작 아침 8시반. 지구 반대편을 날아오면서 얻은 시차증이 깊고 깊은 잠을 선사한 덕택일까. 고작 6시간 남짓 잤을 뿐인데 침대 위에 한나절은 누워있었던 것만 같다. 며칠이 지나야 나아지려나... 컨디션 조절하는 게 쉽질 않겠구나...

건조한 기후 덕에 코가 먹먹하다. 휴지를 밀어넣으니 벌겋게 굳은 핏조각이 묻어난다. 유럽에 건너올때면 첫 며칠은 항상 이렇다. 얼굴은 붓고, 코안은 항상 먹먹하다. 당분간은 물을 끼고 살아야 한다. 앞으로 여기서 한달을 살아야하니 아침, 밤으로 쌀쌀한 날씨도 잘 추스려야 한다. 선수들이나 나나 현지 적응이 중요한 건 마찬가지다.

호텔 1층에서는 아침 배식이 한창이다. 별 넷짜리치고는 작은 규모의 호텔이지만 메뉴가 썩 괜찮다. 계란후라이 2장에 베이컨과 에그스크럼블을 올려놓고 빵을 몇 덩이 집어든 뒤 우유에 스낵을 말아 얹고 사과 쥬스 한 컵을 집어든 채 자리에 앉았다. 깊은 잠은 사람을 더 지치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짧지 않은 비행의 여독이 아직 채 가시질 않아서인지 다들 나처럼 얼굴에 피로가 묻어난다.



실은, 어젯밤 호텔 근처 스포츠 바에서 다국적 축구팬들의 시끌벅적한 응원전에 휩쓸려 정신이 혼미했던 탓도 있다. 호텔이 뮌헨 중앙역 앞에 위치한 까닭인지 밤 열두시가 넘은 시간까지도 주변 술집들은 불야성이었고 코스타리카, 미국, 멕시코, 그리고 독일 각지에서 몰려든 축구팬들이 자기 나라의 유니폼을 입고 국기로 몸을 에워싼 뒤 맥주잔을 쳐올리며 노래를 불러댔다. 술집 구석에서 얌전하게 맥주를 홀짝이고 소시지를 깨물어 먹던 우리는 가끔씩 악수를 건네오는 술취한 그들에 수줍게 호응하고는 이내 관전자의 자세로 돌아섰던 게 고작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정신이 어지러울만큼, 월드컵 전야의 그들은 잔뜩 흥분되어 있었다.

아침 식사를 식사를 마칠 무렵, 열흘 먼저 유럽으로 건너와 있던 김성주 아나운서가 단출한 차림에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식당 안으로 들어온다. 같은 호텔이지만 우리팀보다 일정이 훨씬 빡빡해 피로도가 더 높을 수 밖에 없다. 스코틀랜드에서 독일까지, 그리고 독일에서도 여러 도시를 돌며 방송 강행군을 한 탓에 벌써 많이 지친 인상. 게다가 오늘은 월드컵 개막식과 개막전을 연이어 중계해야하니 마음이 썩 편치는 않은 모양이다. 더군다나 차범근-차두리 부자 사이에 앉아 방송을 진행해야하는, 조금은 낯설고, 또 조금은 부담스러울 수 있는 중계를 앞두고 있어선지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내일부턴 일찍 내려와서 같이 먹어요. 혼자 드시니 보기에 썩 좋지 않네.” 농을 걸어봐도 반응이 시원찮다. 피곤하긴 피곤한 모양. “아, 두리가 안왔느냐고 묻던데 연락해봤어요?” 이번 대회를 통해 해설위원으로 데뷔할 차두리는 아버님(차범근 감독)과 같은 호텔에 묵고 있어 아직 얼굴을 보지 못했다. 몇 개월간 만나지 못했지만 이번 대회에서 나와 10경기 정도 공동해설을 하기로 예정되어 있어 그간 종종 전화 연락을 주고 받으며 기대감을 키워왔던 터였다. 해설 참여가 결정된 날, 국제전화를 걸어와 이렇게 속삭였드랬다. “형, 이제 직장동룐데 잘 해봅시다~”

하긴, 나도 기대되긴 마찬가지다. 현역 분데스리가 선수와의 월드컵 중계라… 하지만 일단 오늘은 A팀과 개막전 중계를 하기로 되어 있다. 마침 함께 있던 A팀 코디네이터로 참여한 경인씨의 휴대폰을 빌려 버튼을 눌렀다. (경인씨는 두리의 친구다.) 이내 들려오는 유쾌하고 반가운 목소리. “언제 왔어요~ 어제 전화할 줄 알았더니 이제야 하시네~ 하하~” 언제나 활기찬 수화기 저편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갑작스레 앞으로 한달 간의 방송이 더욱 기다려진다. / 6월 8일, 뮌헨


② 커튼 레이저

개막도시 뮌헨의 거리는 아직 여유롭다. 자국 독일이 코스타리카와 개막전을 치를 예정이지만, 다들 어디 다른 곳에 모여 환호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인지 개막 너댓시간을 남겨놓은 지금까진 도시 어디서도 들뜨거나 시끌벅적한 풍경은 찾기 어렵다. 역전 앞을 서성이는, 펑크머리의 독일 응원단 몇몇 정도를 빼면 짧은 거리를 달려 도착한 IBC(방송센터)도 마찬가지. 폭풍전야라 하기에도 생뚱맞은 풍경.... 여전히, 다들 너무도 침착하다.

IBC에서 ID카드를 발급받기 위해 주차하려는 과정에서 두 번이나 제지를 당했다. '적당한 곳'에 '적당히' 주차하려고 들면, 어디선가 나타난 보안요원이 독일어 특유의 무뚝뚝한 발음으로 다른 곳으로 가라며 손가락을 들어올린다. 고작 칸막이 하나 차인데 너무 까칠하군 싶으면서도 말을 따를 수 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다. 그래, 아닌건 아닌거다. 게다가 여긴 독일이잖아.

IBC는 뮌헨의 거대한 메세(박람회장) 안에 들어섰다. 건물 앞에 빙글빙글 돌아가는 거대한 축구공 뒤로 철저한 보안 검색이 이뤄지는 출입구를 빠져나가면 전세계에서 몰려든 방송계 종사자들이 각 방송사 부스 안에 모여 개막전 방송 송출을 준비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한국에서는 방송 3사 (MBC, KBS, SBS)가 나란히 부스를 맞대고 모여있고 인터넷 포털 다음에서도 별도 부스를 마련해 입주해있다. 돈이 많긴 많나보다. 와우.

듣자하니, 한 나라에서 3개의 지상파 방송사가 각각의 부스를 마련한 것은 보기 드문 일이란다. 게다가 그 안에서 꽤 많은 경기의 중계방송도 이루어질 예정이라하니 이 또한 상당히 예외적인 일이라고. 거의 모든 경기를 3사가 동시에 생중계하는 풍경은 방송사 종사자들에게도 매우 낯설 정도라니 뭔가 분명 특이한 상황인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개막전을 앞두고 뮌헨 알리안츠 스타디움과 IBC의 MBC 부스 안이 점점 바빠진다. 부스 안에서는 경기장 곳곳을 잡아내는 30여개 카메라의 그림이 동시에 멀티비젼으로 펼쳐진다. 그야말로 장관이다. 이렇게 많은 카메라를 동원하는데 TV시청이 재미없을 리 없다. 그 중 한 화면에는 중계석에 앉은 3인의 진행자들의 모습이 비친다. 차두리, 김성주, 차범근. 내 시선은 아무래도 '데뷔전'을 치를 차두리에게 쏠린다. 아직 방송 전이라 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는 와중에도 '방송 신인' 차두리는 신기한게 많다. 카메라를 만지작거렸다가 자료를 들춰보다가 옆 사람에게 말을 걸기도 하고, 몇 번은 마이크에 대고 중얼거린다. "내 얘기 들려요? 아~아~" 아... 귀..엽다. -_-



개막식과 개막전을 들려주는 데 이 두 사람만한 적역은 없다. 독일 1부리그 분데스리가에서 무려 10년간 최고 선수로 뛴 차범근, 독일에서 태어났고 이제는 분데스리가에서 4번째 시즌을 마친 차두리. 화면에 독일의 어떤 인사가 나오든, 유럽의 어떤 레전드가 나오든 이들의 입에 귀기울이기만 하면 궁금증은 술술 풀릴 것이다. 그것도 "그들과 함께 뛴" 생생한 정보를 통해서 말이다.

개막식의 하이라이트는 역대 월드컵 우승 멤버 중 생존자들을 모시는 무대. 역시 축구 행사는 축구로 풀어야 제대로 멋이 난다. 과다한 연예인 노출은 축구 행사의 분위기를 제대로 살릴 수 없다. 머리가 희끗한 축구계의 전설들이 등장할 때마다 월드컵 개막의 흥은 한껏 돋워진다.

개최국 독일의 개막전 상대는 코스타리카. 얼마 전, 주전 멤버를 총동원한 상태에서도 일본에게 0-2로 끌려가다 2-2로 간신히 비긴 독일은 그때 체면을 구겼던 탓인지 초반부터 강하게 밀어붙인다. 얼마 전 첼시 이적은 마무리한 발락이 부상으로 벤치에 앉아있지만 독일 병정들의 일사분란한 움직임은, 월드컵만 되면 더욱 예리해졌던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첫 골은 필립 람의 몫. 언젠가 한국과의 경기에서 차두리에게 고전했던 독일의 왼쪽 수비수 필립 람은 상대가 커다랗게 남겨놓은 자기 앞쪽의 공간을 파고 들어 강한 오른발 중거리슛으로 빠른 선제골을 뽑아낸다. 폭발하는 경기장, 관중석, 그리고 월드컵. 그렇게 달아오른 경기는 2002년에 해트트릭을 기록했던 클로제의 2골과 프링스의 막판 쐐기 중거리포를 앞세운 독일의 승리로 끝난다. 결과는 4-2. 코스타리카는 (그 옛날 지나치게 높은 몸값을 요구한 소속팀 탓에 영국 진출에 실패했던 최용수 대신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에 입단했던) 골게터 파울로 완초프의 2골로도 승점을 따내지 못했다. 이변을 꿈꾸었지만 선전에 그치고 말았달까. 하지만, 제3자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흥미로운 개막전이다. 게다가 무려 6골이나 터지다니. 이어진 폴란드-에콰도르 전에서 에콰도르가 2-0 완승을 거두는 작은 이변을 일으키면서 개막일의 흥분은 잠시 정지.

재미있는 건 독일의 TV다. 공중파 ZDF 화면을 통해 지켜 본 개막전은 단 1명의 코멘테이터가 경기를 중계한다. 그런데 말이 거의 없다. 누가 볼을 잡았는지 가끔 이름을 불러줄 뿐이고 자국 독일의 골이 터져도 흥분하지 않는다. 지극히 냉정하고 차분한 중계.

하지만 하프타임이나 경기 이후에는 전문가들을 앉혀놓고 심도있는 분석을 곁들인다. 어느새 편집이 끝났는지 오프사이드 상황에 대한 설명이나 독일 미드필드 진의 침투에 대한 이야기도 추가되고 있다. 패널로 등장한 90년대 독일 천재 미드필더로 불렸던 안드레아스 묄러와 차두리의 새로운 팀인 마인츠05의 젊은 감독 위르겐 크롭은 차분한 어조로 무언가를 설명한다. (독일어라 내가 알아들을 리는 전혀 없지만 말이다. 하하)

기나긴 하루가 끝나고, 밤 10시가 넘어서부터 내리기 시작된 어둠도 어느새 도시 전체를 뒤덮는다. 이제는 나의 개막전이다. 스웨덴과 트리니다드&토바고 경기를 시작으로 해설자로서 맞는 두번째 월드컵을 킥오프하게 된다. 갑자기, 다시 심박수가 빨라진다. 이 세계 최고의 축제 한 가운데에 내 자리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다시 한번 뿌듯할 뿐이다. 그 마음에 정성을 얹어, 이곳의 열기와 풍경을 내가 가진 말과 글을 통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주련다. 앞으로, 한달이다. / 2006년 6월 9일, 뮌헨


③ 중계 시작, T&T의 반란

새벽에 두 번 정도 잠이 깨는 건 오늘도 마찬가지. 평소엔 잘 꾸지 않던 꿈도 독일로 건너온 뒤엔 하루에도 서너편이다. 잠을 너무 깊게 자 그런가보다 싶었는데 룸메이트인 김 부장님 말에 따르면 잠을 설쳐서랜다. 선잠이 들면 개운하지도 않고 꿈도 많이 꾼다고. 아니, 누구나 하루에 몇 편씩 꿈을 꾸지만 잠을 깊게 못 자면 기억을 더 잘하게 된다고 했던가…

호텔 로비에 설치된 컴퓨터를 통해 인터넷에 접속하니 놀라운 뉴스가 하나 떴다. 토고 감독 사임. 게다가 아데바요르도 감독 따라 월드컵 출전 보이콧을 선언할 지 모른다니 이게 왠 난데없는 해프닝인지. 토고 축구협회에서 선수들의 보너스를 보장해주지 않아 선수들이 훈련에 열의를 보이지 않은 게 이유였다고 하는데 우리 입장에선 쉽게 이해되지 않는 사태라 잠시 멍하니 모니터만 바라보고 말았다. (토고 감독 사임은 오토 피스터가 독일인이기도 한 이유로 여기서도 꽤나 큰 뉴스였다.)

오늘은 월드컵 첫 방송이 있는 날. 트리니다드 토바고와 스웨덴의 경기다. 준비해 온 자료를 한번 더 훑고는 스튜디오가 마련된 IBC로 출발했다. 당초 우리팀에 합류하기로 했던 두리는 잉글랜드와 파라과이 경기를 중계하기 위해 프랑크푸르트로 떠났다. 당분간 (아니, 어쩌면 내내) 차 감독님과 함께 방송을 계속하는 것으로 일정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팀 스탭진 모두 시원섭섭한 기분. 3인 중계가 쉽지 않다는 점에선 시원하지만 뭔가 색다른 중계를 선사할 수 있었다는 아쉬움은 섭섭했던거다.



하지만 시청자 입장에서 보면 차범근-차두리 부자의 중계는 정말 매력적이다. MBC 방송을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IBC에서 우리팀 중계를 준비하는 동안 두 해설자가 김성주 캐스터의 진행으로 중계하는 잉글랜드-파라과이 전을 시청했다. 차범근 위원의 깊이있는 분석에 차두리 선수의 현장감있는 코멘트가 더해지는 것도 그렇지만 내겐 두리 특유의 재기발랄한 표현법이 신선해서 좋다. 이를테면 전봇대의 매미라든지, 장신 선수 뒤에 있으면 공이 보이질 않는다든지 하는 류의 이야기들 말이다.

물론 이 날의 압권은 로빈슨이 찬 볼이 경기장 천정에 매달린 전광판을 맞춘 직후에 이어진 대화였다. 이번 시즌까지 잉글랜드-파라과이 전이 열린 프랑크푸르트 경기장을 홈으로 썼던 두리는 로빈슨 해프닝 직후 이런 멘트를 날렸다. “팀 동료들과 저거 맞추는 내기 했었는데 어렵더라, 불가능할줄 알았는데 월드컵이라 이런 것도 본다” 그러자 이어지는 차범근 위원의 말씀. “허벅지 파워가 부족했나보죠~” 여기에 대꾸하는 두리의 말이 걸작이다. “아니예요~” 4천만이 보는 방송에서 아버지에게 말대답을! 하지만 시청하는 입장에선 그마저도 유쾌한 재미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부자지간, 즉 ‘국민부자’가 자신들의 생을 바친 축구를 두고 벌이는 대화를 엿듣는 기분이라 흥미진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잉글랜드가 상대의 자책골로 1-0 신승을 거두는 사이 내 차례가 다가온다. 11번 도전 끝에 월드컵 첫 본선 출전을 앞둔 트리니다드 토바고와 11번째로 본선에 나서는 스웨덴의 맞대결이다. 누가봐도 일방적인 승부가 될 수 밖에 없는 시합.

트리니다드 토바고는 역대 월드컵에 진출했던 국가 가운데 가장 규모가 작은 나라다. 트리니다드 섬과 토바고 섬을 중심으로 한 이 뮌헨만한 크기의 나라엔 110만 인구가 모여산다. 천연가스 발굴 이후 나라 살림이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인구의 12%는 하루에 1천원 정도 밖에 벌지 못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자국에는 고작 7개의 팀만으로 운영되는 프로축구 리그가 있는데 평균 관중이 500명 남짓이라고 한다. 게다가 소속 선수들은 많아야 100~150만원 가량의 월급을 받는다고 하니 이들 대부분의 꿈이 상위든 하위든 해외 리그로 빨리 진출하는 것이라던 언젠가 읽은 잡지기사가 떠오른다.

반면 스웨덴은 월드컵 결승에도 오른 적 있는 북유럽의 전통적 강호. 한달에 몇억씩 버는 스타들이 수두룩한 팀이다. 트리니다드 토바고의 레오 벤하커 감독이 제 아무리 레알 마드리드, 아약스, 네덜란드 대표팀 감독을 역임한 명장이라 하더라도 완패를 면하긴 힘든 상대.

하지만 경기는 예상과 달랐다. 트리니다드 토바고는 선발로 내정했던 잭 골키퍼가 경기 직전 몸을 푸는 과정에서 다치는 바람에 37살의 노장 히슬롭 골키퍼를 긴급 투입하는 해프닝을 겪었지만 이게 전화위복이었다. 히슬롭은 경기 내내 선방을 거듭하며 팀의 선전을 이끌었다. 가장 눈에 띄는 선수는 역시 드와이트 요크였다. 99년 유럽 챔피언스리그 득점왕이기도 했던 요크는 전성기 시절 박지성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활약했던 프리미어리그 최고의 공격수 출신이다. 지금은 호주 리그에서 뛰며 선수 말년을 마감하고 있지만 4년만에 대표팀에 복귀한 그는 이날 모두의 예상을 깨고 수비형 미드필더로 나서 맹활약했다. 요크의 헌신적인 수비 가담, 산초의 연이은 걷어내기 등에 힘입은 트리니다드 토바고는 후반 초반 수비수 존이 퇴장당하며 위기를 맞았지만 ‘약체의 반란’에 신이 난 독일 홈 관중의 응원까지 등에 업고 선방을 계속했다. 재미있는 건 독일 관중의 열성적인 트리니다드 토바고 응원. 갑자기 58년 스웨덴 월드컵 4강전에서 홈팀 스웨덴을 만나 패퇴한 독일 선수들의 항의가 떠오른다. “편파판정이야!” 그 뒤 스웨덴 사람들은 한동안 독일 여행을 기피했더라지. 스웨덴 사람들이 몰고 온 차엔 독일 주유소에서 기름을 안넣어주었다던가…

여하간 경기는 결국 0-0으로 끝났다. 라르손, 이브라히모비치, 륭베리 등을 앞세운 스웨덴은 단 한골도 뽑지 못한 채 승점 1점을 얻는데 그치고 말았다. 그리고 트리니다드 토바고 선수들은 마치 우승이라도 한 듯 환호한다. 대회 최약체로 꼽히던 팀이 첫 출전한 월드컵의 첫 경기에서 강호를 상대로 무승부를 따냈으니 얼마나 기쁘겠는가. 벤하커 감독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이어진 아르헨티나와 코트디부아르의 경기는 달랐다. 더 이상의 이변은 없었고 아르헨티나는 리켈메의 발 끝이 만들어낸 두 골(크레스포, 사비올라)에 힘입어 드록바의 1골에 그친 코트디부아르를 2-1로 물리쳤다. 하루에 3경기씩 꽉꽉 눌러보려니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맥주 한 병 들이키고 쌀쌀한 독일의 밤거리를 지나 숙소로 돌아왔다. 어느새 자정이 넘은 시간. 이제 또다른 3경기가 기다리고 있는 새로운 하루를 꿈꾸며 잠자리에 들 시간이다… / 6월 10일, 뮌헨


④ 독일의 태양은 뜨거웠다

2006 World Cup 1R Review

뜨겁다. 건조하다. 한국에서라면 왠만해선 맛볼 수 없는 사우나 같은 여름. 30도에 육박하는 기온이 20%대의 습도와 만나니 콧속이 바싹 마르고 입술은 부르튼다. 한국의 끈적한 무더위에 비하면 땀에 절어 불쾌한 기분은 덜하지만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느껴지는 갈증과 꽉 틀어막힌 콧속은 아무래도 적응이 쉽지 않다. 한가로이 그늘만 찾아 이동하는 내가 이럴진대 그라운드 위에서 온몸을 불사르는 선수들이야 어떻겠는가. 매 경기 전반과 후반의 경기력에 큰 차이가 발생하는 것, 그래서 역전 승부가 빈번하게 벌어지는 것도 이런 기후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대회 둘쨋날. 파라과이를 1-0로 격파한 잉글랜드 선수들의 표정이 밝지 않다. 경기 내내 유난히 지쳐보이는 선수들의 표정 못지 않게 이번 대회를 끝으로 지휘봉을 놓는 에릭손 감독과 그 옆에 앉아 열심히 견습과정을 밟고 있는 ‘차기 감독’ 맥클라렌 역시 잔뜩 찌푸린 인상이다. 이것 역시 다 기후 탓이다. 승리의 기쁨으로는 극도의 목마름을 해갈할 수 없었던게다. 결국 잉글랜드 축구협회는 다음 날 대변인을 통해 가벼운 불평을 늘어놓게 된다. “물을 더 많이 준비해달라. 평소엔 20리터면 충분했는데 이번 경기에선 70리터 정도 마셨다. 그리고 선수들이 더 쉽게 물을 마실 수 있도록 그라운드 주변에 더 많은 물통을 구비해달라.” 잉글랜드 축구협회가 유난떤다고 느꼈을 팀들이 많았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 역시 첫 경기 뒤엔 전적으로 동조하지 않을 수 없었을거다. 작렬하는 태양과 지극히 낮은 습도 사이에서 90분 내내 최상의 경기력을 과시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절감했을터이니. 역전 승부가 속출하는 과정에서도 밤 9시(한국시간 새벽 4시) 경기에서는 의외의 승부가 적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가 아닐까.

한번 더 생각하면, 이번 대회에서 중거리슛이 유난히 많은 것도 날씨 탓일지 모르겠다. 상대팀 선수들과 몸을 부벼야 하는 페널티 박스 안쪽에서의 다툼은 달갑지 않은 일. 그러니 상대 선수와 경합하는 상황을 만들기 전에 공을 냅다 후려차는 편이 속시원한 선택일 수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이번 대회 공인구 ‘팀 가이스트’는 역대 공인구 가운데 가장 탄력이 좋다는 평을 듣는 공 아니던가. 더위에 지친 선수들의 발끝을 떠나 쉼없이 쭉쭉 뻗어나가 상대팀 골망에 꽂히는 이 신생구의 위력에 골키퍼들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푸념을 늘어놓고야 만다. 하지만 빠르고 길게 공을 넘겨주는 선수들의 플레이는 동료들에게 환영받지 못할 때도 있다. 최후방에서 전방으로 한번에 찔러주는 패스가 많이지면서 측면 플레이어들의 체력소모가 커졌다. 빈 공간에 떨궈진 공을 좇기 위해 온 힘을 기울여 뜀박질해야 하는 측면 공격수들에게 땡볕 아래의 전력질주는 그야말로 끔찍한 일. 측면 공격수들의 날카로운 크로스가 상대팀 최종 수비수와 골키퍼 사이를 송곳처럼 찌르는 장면을 더 자주 보기 위해서는, 그리고 상대와의 경합을 마다앉는 탁월한 테크니션들의 유려한 드리블링과 수비수들을 속아넘기는 공격수들의 개인기를 즐기기 위해서는 독일의 6월 오후를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이 잠시 열기를 가라앉혀주어야 한다. 현란한 개인기를 자랑하는 브라질 대표팀의 조별예선 일정이 한낮의 열기와 한번도 만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화려한 테크닉을 즐기려는 축구팬들에게는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겠다.


독일과 네덜란드는 숙적이다. 축구판에서도 다르지 않아 두 팀간의 승부는 ‘유럽의 한일전’이라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치열하다. 언젠가 두 나라의 대표팀이 맞붙었을 때 독일 공격수 펠러와 네덜란드 수비수 라이카르트가 서로의 안면부에 타액을 명중시키려다 빨간색 카드를 받았던 장면은 그 상징적인 대목이다.

그래서일까. 독일월드컵에 참가한 네덜란드 출신 감독이 이끄는 팀들의 성적이 빼어나다. 승리는 물론 명승부를 엮어내며 팬들을 매혹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네덜란드 감독들의 탁월한 용병술이 있다.

가장 먼저 거론해야 할 것은 역시 대한민국과 호주다. 우리와 깊은 인연을 간직한 감독들이 이끄는 두 팀은 감독의 두뇌가 얼마나 극적인 승부를 연출할 수 있는 지 보여준 명징한 사례다. 대한민국의 아드보카트 감독은 난적 토고와의 경기를 앞두고 후반을 대비했다. 상대의 허를 찌르듯 그간 연습해 온 포백 대신 스리백 수비를 내세웠고 모두가 선발로 예상했던 김남일과 안정환을 벤치에 앉혔다. 수비진의 실수로 0-1로 뒤진 채 전반을 마쳤지만 아드보카트가 준비한 후반전 카드는 아직 주머니 속에 남아있는 상황. 이천수에게 맡긴 프리킥이 불을 뿜자 아드보카트의 첫번째 카드인 안정환이 드라마를 완성한다. 박지성이 수비수를 달고 반대편으로 움직이자 그 뒤에 남겨진 공간에서 안정환은 역사적인 중거리포를 성공시켰다. 안정환, 조재진, 이천수, 박지성 등 공격수 4명을 동시에 가동한 아드보카트의 구상이 먹혀든 것이다.

호주의 히딩크 감독은 아드보카트 못지 않다. 일본에게 어이없이 선제골을 내준 그는 후반 들어 장신의 케네디를 최전방에 투입했고 그는 히딩크의 기대에 부응하며 일본 수비를 허물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전극의 마무리는 히딩크가 추가 투입한 두 선수의 몫이었다. 부상에서 갓 회복한 팀 케이힐은 동점골과 역전골을 터뜨렸고 알로이시는 추가골을 집어넣으며 3-1로 점수 차를 벌렸다.

네덜란드 대표팀을 이끄는 반 바스텐의 승리가 상대적으로 평범한 성과라면 트리니다드 토바고의 감독 레오 벤하커의 경우는 어떨까. 이번 대회 최약체로 분류된 트리니다드 토바고는 1승은 고사하고 단 1골을 넣기도 쉽지 않을거라는 전망 앞에 이견을 달지 않았던 팀. 한때 유럽 챔피언스리그 득점왕에 오르기도 했던 드와이트 요크만이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뿐이었다.

하지만, 트리니다드 토바고에는 왕년에 레알 마드리드, 아약스, 네덜란드 대표팀 등을 이끌었던 명장 벤하커가 있었다. 벤하커는 이날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20세기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대표 공격수로 이름을 날렸던 요크의 보직을 과감히 중앙 수비형 미드필더로 바꾸었다. 그리고 요크는 중원에서 상대 선수에게 무수한 태클을 시도하는, 낯설지만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며 팀 수비를 이끌었다. 그 덕분에 트리니다드 토바고는 수비수 한 명이 퇴장당하는 악재에도 불구하고 0-0 무실점을 지켰고 승점 1점을 따냈다.

벤하커의 책략에 말려든 스웨덴은 라르손, 이브라히모비치, 륭베리 등의 스타를 앞세우고도 이변의 희생양이 된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고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한 이들은 이튿날 회복 훈련 도중 팀동료들끼리 주먹다짐을 벌이는 ‘자학성’ 뒷풀이로 무너져내렸다. /2006년 06월 16일


⑤ 실리적인(?) 독일 용품점

조별예선 이후로는 주로 뮌헨 방송센터에 머물고 있다. 이동이 줄어들다보니 시간 여유가 생겨 어제는 모처럼 아이쇼핑도 할 겸 인근 상점에 들렀다. 그런데 이상하다. 불과 1주일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월드컵 관련 상품들이 죄다 반액 할인중이 아닌가. 특히 눈에 띄는 건 오렌지색이 화려한 네덜란드 대표팀 유니폼이다. 나이키에서 발매한데다 네덜란드 대표팀이 여전히 메인 유니폼으로 착용하고 있는 상품인데 몇일만에 65유로에서 29유로로 거의 절반 이상 값이 떨어진 것은 분명 의아한 일. 동행했던 박문성 위원이 점원에게 물었더니 대답이 걸작이다. "월드컵 탈락한 팀이거든요"

그래서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니, 정말, 월드컵에서 탈락한 팀들의 관련 상품만 반액 할인이다. 일본, 스웨덴, 스위스 대표팀 마크가 새겨진 모자들 역시 정가 6유로에서 3유로로 값이 떨어졌다. (스위스는 고작 하루 전에 탈락했는데 벌써 절반 가격을 견출지에 적어 붙여두었다. 부지런하기도 한 점원들이여!) 실리적인 판매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참 냉철한 사람들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을 수 없다. 대회에서 빠졌다고 상품들 역시 같은 신세가 되다니 말이다. 하도 신기하고 재미나 옆에서 이탈리아가 새겨진 푸마 트레이닝 수트를 뒤적이던 박문성 위원에게 "이탈리아 탈락하고 나면 반값될테니 그때 오죠?"라고 말했더니 "그런가?"하며 웃는다. 아무튼 참으로 독특한 마케팅이 아닐려나.

6월 27일, 뮌헨/ 서형욱팀장

출처 : 엠파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