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게시판 ▶ 세상보기
세상보기

제목‘2000년 벤처 복마전’ 적나라한 탐방기2005-07-29
작성자관리자
첨부파일1
첨부파일2
첨부파일3
첨부파일4
첨부파일5
불쌍한 CEO들의 달걀 세우기 - 최영익 지음 /나무와 숲

우리나라 벤처기업의 실체를 이만큼 적나라하게 표현한 책은 찾기 힘들 것이다. 저자는 사법고시 합격 후 국내 최고 로펌이라는 ‘김&장’을 거쳐 미국의 변호사와 변리사 자격을 가진 짱짱한 경력의 변호사다. 이례적으로 ‘벤처기업 전문변호’라는 분야를 택한 만큼 그의 지적에는 무엇보다 ‘한국의 새로운 기업상’으로 예견됐던 벤처기업에 대한 실망과 함께 애정이 담겨있다.

저자가 벤처기업을 사업 파트너로 삼아 개업한 시기는 2000년. 전국민이 벤처의 사업설명서라는 A4용지 한장에 돈을 쏟아붓고, 코스닥투자에 미친 뒤 그 실망이 포화처럼 쏟아지던 때다.

대기업이나 외국자본의 각종 분쟁을 전담했던 변호사였던 만큼 직설적인 표현을 자제한 티가 역력하지만, 벤처기업을 고객으로 삼은 후 체험한 각종 사례는 기가 막힐 정도다. 우수한 교육기관을 졸업했거나 외국의 명문대학을 마친 이들이 전혀 부끄러움 없이 회사 또는 타인의 지적재산이나 부를 자신의 것과 동일시하고, 투자자나 거래처를 속이려고 든다.

가공 매출과 끼워넣기를 밥먹듯이 하고 법률을 몰라도 너무 모르고,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틈만 나면 자본이익에 매달려 경영권 분쟁이 끊이지 않는 아비규환. 150만원의 룸살롱 비용은 서슴없이 사용하지만 50만원의 자문변호사 비용은 ‘회사가 어려워 줄 수 없다’는 넋빠진 경영자들이 벤처실패의 이유라는 것이다.

밤새워 연구개발에 충혈된 눈,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에 대한 정열, 낮은 임금이지만 미래에 대한 기대로 가득찬 눈빛은 벤처기업의 이론에 불과했다. 양심적이고 충직한 몇몇 벤처기업 대표들은 무거운 채무에 시달리거나 생활비조차 조달하지 못하는 사례를 저자는 가슴 아프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도덕적이거나 충직한 경영자의 자질이 기업의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

저자가 본 경영권 분쟁의 사례를 보자. 한 여성 벤처기업가는 창업 당시 임직원에게 주식을 나눠주었다. 그런데 이들은 주주권을 담보로 회사에 손실을 끼치고, 심지어 투자자를 끌어들여 인수합병(M&A)을 시도했다. 결론적으로 임직원을 횡령혐의로 고소하겠다는 협박과 계약 불이행을 근거로 회사경영권을 빼앗으려는 투자자를 물리쳤지만, 이 여성 벤처기업가는 배신감과 절망에 눈물을 흘렸다.

또 다른 벤처기업은 공동창업자가 대표이사직을 두고 싸움을 벌였다. 흔히 기술과 관리파트를 나눠 공동창업자가 됐지만 한쪽에 힘이 몰리면서 주주들을 동원하고, 직원들과의 연합을 통해 경영권 쟁탈전을 벌인다. 이 와중에 전망좋고 내실있던 벤처기업이 거덜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 책이 단순히 ‘벤처기업 탐험기’에 그치지 않는 것은 벤처기업이 우리사회에 끼친 영향에 대한 분석 때문이다. 가령 중소기업과 벤처기업은 무엇이 다른가? 흔히 말하듯 첨단기술을 대상으로 하면 벤처기업이고, 구기술을 가지면 중소기업인가? 가장 큰 차이는 동업, 혹은 개인창업이라는 명확한 자기자본으로 시작된 중소기업과 달리 벤처기업은 벤처캐피털 등 다양한 사회적 자본이 투자된 사회성을 갖고 시작한다. 지분관계가 명확하고, 지배구조가 단순한 기존기업의 출생과 확연히 다르다.

공적자본의 사적활용이라는 틀을 가진 벤처구조를 막연히 ‘내돈이겠거니’하며 퍼쓴 부도덕한 벤처경영자들이 침몰하는 것은 당연하다. 명확한 문구가 빠져있고, 외국과의 합작과정에서도 기본적 법적 토대조차 인지하지 못한 주먹구구 계약서로 한국 벤처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저자는 ‘불연속적 긴장을 계속해서 스스로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정신인 기업가정신’을 되찾는 것만이 벤처의 본질이요, 부활책이라고 믿는다. 벤처(venture)라는 말의 어원이 모험이라는 단어라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시원한 해석이다.

이인표기자 lip@munhwa.com
출처:문화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