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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묻지마 외출' 아내 감동 먹인 깜짝 이벤트2005-11-10
작성자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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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 매운탕과 작은 케이크를 준비했습니다

"오늘 퇴근하고 바로 집으로 와."
"왜, 무슨 일 있어?"
"아니, 잠깐 외출하려고."
"어디 가는데? 난 그냥 집에 있고 싶은데."
"김칫국물 좀 마시지마. 나 혼자 나갔다 올 거야."
"혼자 어디 가는데? 친구 만나러?"
"비밀!"

어제 아침에 출근하려는데 아내가 대뜸 퇴근하고 바로 집으로 오라고 합니다. 이유도 말해 주지 않고 무조건 일찍 들어오라고 하니 궁금하기 짝이 없었지만 생글생글 웃으면서 비밀이라고 연막을 치니 그 모습이 어린애 같다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옵니다.

저녁에 퇴근하고 집에 가니 아내는 벌써 외출 차림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정장으로 쫙 빼 입고. 어디 가는지, 뭐 하러 가는지, 언제 올 건지 묻고 싶었지만 쩨쩨하게 따지지 말고 그냥 통 크게 넘어가기로 했습니다.

세린이와 태민이한테 인사를 하고는 현관문을 나섭니다. 엄마가 나가자마자 태민이가 울음을 터뜨립니다. 엄마 금방 올 거라는 말을 계속 반복하면서 번쩍 안아 공중 그네도 태워 주고, 제 발등에 태민이 발을 올려놓고 쿵쿵쿵 소리를 내며 걸어가는 공룡놀이도 해 주고, 비행기도 태워줬습니다.

다행이 울음을 그친 태민이가 누나하고 잘 놉니다. 놀고 있는 두 아이를 보고 있다가 문득 든 생각은 세린이의 태도. 다른 때 같으면 울며불며 따라간다고 보채거나, 엄마 어디 갔냐고, 언제 오냐고 몇 번이고 물었을 텐데 멀쩡하게 잘 노는 겁니다. 그것도 평소와는 달리 동생하고 싸우지도 않고.

그래서 나의 추측은? 분명히 엄마가 세린이한테는 어디 가는지를 말해 주었고, 동생과도 싸우지 않고 잘 놀면 맛있는 거 사준다고 했을 거라고. 순간 더 이상 아무 것도 묻지 않고 통 크게 보내 주겠다는 생각은 온 데 간 데 없고 오로지 머리 속에 드는 생각은?'

'요 녀석만 잘 구슬리면 알아낼 수 있겠군.'

둘째를 무릎에 앉히고 세린이에게 물어 봅니다.

"세린아, 엄마 어디 가는지 알아?"
"아~니."

이 말투와 행동. 몸을 앞으로 삐쭉 내밀면서 '아니'라는 말을 길게 빼는 것이 분명 이 녀석은 알고 있다는 확신이 듭니다. 살살 유도 심문을 시작합니다.

"아빠는 아는데. 엄마 친구 만나러 간 거야."
"아니야!"
"아니야, 엄마 친구 만나러 간 거야."
"아니야, 엄마 유치원 갔어. 아빠는 그것도 몰라?"

크크! 단 두 마디에 세린이의 입에서 진실을 밝혀냈습니다. 아마 정기적으로 하는 학부모 상담을 하러 간 것 같습니다. '아이구, 유치원 가 놓고는 뭐 대단한 비밀이 있는 것 마냥, 웃겨 진짜. 어디 한 번 당해 봐라. 어디 갔다 왔냐고 하면 뭐라고 하나 봐야지' 속으로 아내의 유치한 장난에 웃음이 나오면서도 골탕이나 한 번 먹여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이들하고 한참을 놀다가 세린이가 졸려 하는 것 같아서 두 아이를 데리고 침대에 갔습니다. 책을 무려 10권이나 읽어 달라는 세린이, 덩달아 고사리 손으로 2권을 들고 오는 둘째를 침대에 눕히고는 열심히 책 읽어 주고, 노래 불러주고, 옛날이야기 해 주고 해서 잠을 재웠습니다.

아이들 이불을 덮어 주고 거실로 나온 후 순간 제가 무척이나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 아이 재우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요? 아무도 보는 이 없건만 괜히 어깨 으쓱거리며 거실을 왔다 갔다 하면서 어떻게 아내에게 통쾌히 복수할까 생각하다가, 문득 복수보다는 기특한 짓 하나 더 하기로 했습니다.

내가 생각한 기특한 짓이란, 아내가 저녁을 먹지 않고 갔다는 생각이 들면서 아내를 위한 깜짝 이벤트로 만찬을 준비하기로 한 것입니다. 뭐 요리할 것 없나 냉동실을 보니 닭이 보입니다. 옳지, 닭 매운탕 하면 되겠다!

닭을 먹기 좋게 썰고, 껍질을 벗긴 후 기름기를 제거하기 위해 살짝 한 번 끓여 냅니다. 베란다에 가서 시골에서 가져 온 감자를 다듬고, 양파를 까고, 냉장고와 찬장에서 고추장, 마늘, 고추, 파, 고춧가루, 간장 등 요리에 필요한 재료를 꺼내 놓고는 본격적으로 요리를 시작합니다.

기름기를 제거한 후 국물이 졸 것에 대비해 물을 가득 넣고는 고추장과 마늘, 고춧가루와 간장을 놓고 보글보글 끓입니다. 끓는 동안 다듬어 놓은 감자를 약간 두텁게 썰고, 양파와 파를 썰어 두었습니다.

감자부터 넣고, 한참을 끓이다 양파와 파를 넣었습니다. 중간 중간 맛을 보니, 음~ 좀 싱겁군. 간장 약간 더. 음~ 덜 얼큰하군. 고춧가루 듬뿍. 에이~ 고춧가루 너무 넣나? 텁텁하군. 채로 고춧가루 건져내고 대신 고추 2개 송송 썰어 넣고. 다시 맛을 보니, 음~그런 대로 괜찮긴 한대. 그런데 약간 2% 부족함이 드는 건 뭘까?

양념의 부조화에서 나오는 듯한 이 부족함. 뭔가를 넣어야 할 것 같기는 한데, 뭘 넣어야 될지 머리만 긁적긁적. 그 뭔가가 생각이 안 나니 무작정 김치 냉장고와 냉장고 야채수납 공간을 뒤지다 보니 눈에 띄는 게 있으니 깻잎!

넣어도 되나? 지금 그럭저럭 먹을 만한데 괜히 넣었다고 다 된 밥에 재 뿌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일단 넣고 보자. 어떻게 되겠지 뭐. 깻잎을 썰어 넣은 후 맛을 보니, 음~ 넣기를 잘 했군. 깻잎의 독특한 향이 맛을 한층 돋우어 주었습니다.

바늘 가는 데 실이 따라가기 마련. 아이들 방문을 살짝 열고 보니 잠에 푹 빠져 있었지만 혹여 깨서 울까봐 열심히 달려 슈퍼에 가서 소주 한 병 사들고 오는데, 얼마 전에 문을 연 빵집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래, 기왕이면 케이크도 하나 사자. 조그만 케이크 하나 들고 혹시 아이들이 깼을까봐 불안한 마음에 또 다시 열심히 집으로 뛰어왔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뛰었는지 얼굴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습니다.

아내를 위한 감동 이벤트 준비 끝! 작은 방에 상을 차려 놓고는 아내를 기다립니다. 1분이 1시간 같이 느껴집니다. 아! 이 나의 기특함을 빨리 아내가 보고 '어머, 이게 뭐야? 이거 나를 위해 준비한 거야? 맛있다! 고마워' 하고 말하는 것을 빨리 듣고 싶은데,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지?

작은 방에서 거실로, 거실에서 복도로, 복도에서 다시 작은 방으로, 다람쥐 마냥 왔다 갔다 하면서 아내를 기다립니다. 똑똑! 앗, 아내다. 아내는 혹시 아이들이 깰까봐 살포시 들어옵니다. 순간 눈을 가리고 상이 차려진 작은 방으로 데려갔습니다.

짠~ 아내의 눈을 가렸던 손을 치우면서 전쟁에서 승리한 개선장군 같은 표정을 지었습니다. 역시 아내의 반응은 가히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이거 나 위해서 준비한 거야? 웬일이야 웬일."
"당연하지. 내가 이거 만드느라고 얼마나 고생한 줄 알아. 애들 재우고 정신통일, 온갖 정성을 다해서 한 거라고. 그나저나 맛 좀 보시지요."
"잠깐만 옷 좀 벗고."
"어허, 지금 내 성의를 무시하는 거야. 그런 거야?"
"알았어 알았어. 맛있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진짜 맛있다. 잘했네. 고마워. 매일 이런 날만 있으면 좋겠다."
"자기 감동 먹었지 그치?
"응! 나 감동 먹었어."
"그래, 까짓 거 그럼 내가 매일 감동 먹게 해줄게. 하하하."

그날 저녁 아내와 저는 내가 만든 닭매운탕에 소주 한잔 거하게 먹었습니다. 내친 김에 설거지까지 말끔히 제가 처리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아내가 참기름 바른 김을 구워 식탁에 올렸더군요. 역시 사 먹는 김보다는 이렇게 집에서 구워 먹는 김이 제 맛입니다. 아침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리고 케이크는 그 날 안 먹었습니다. 저는 먹자고 했지만 아내가 아이들 주자고 해서 못 먹었습니다.

어제 일로 새삼 깨닫고 결심한 게 있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작은 것에도 감동과 행복을 느낀다는 것을. 앞으로 자주 해야겠습니다. 다음에도 또 닭매운탕 하면 그때는 욕할까요?

출처 : OhmyNews 장희용(jhy2001)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