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읽히는 매뉴얼, 제품 승패 판가름하기도"
미국 유망직종 13위..의학연구자, 엔지니어 제쳐
이공계 전공에 언어 논리력, 문장력 갖추면 유리
"제품 품질은 좋은 것 같은데 사용설명서(매뉴얼)를 읽어보니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고...불편해 못쓰겠어요"
소니 등 일본 가전 업체들은 북미 시장에 진출할 당시 이런 불만 사항에 시달렸다.상품 포장을 뜯자마자 사용설명서를 꼼꼼히 읽어보는 선진국 소비자들이라 일본어 원본을 조잡하게 번역한 매뉴얼을 참기 힘들었던 것이다. 이제 매뉴얼은 개발자가 대충 써서 넘기는 ´곁다리´ 품목이 아니다. 기능이 갈수록 복잡해지는 IT(정보기술) 기기나 전문 소프트웨어의 경우 쉽게 읽히는 매뉴얼이 세계 시장에서 승패를 판가름하기도 한다.
이에 따라 부각되는 직종이 바로 매뉴얼의 집필 및 번역 감수를 책임지는 ´테크니컬 라이터´(Technical Writer). 국내에서는 아직 생소한 명칭이지만 미국 등에서는 어엿한 전문직 대접을 받는 직업이다.
CNN 머니 매거진이 최근 평균 연봉과 10년 간 성장 전망을 기준으로 평가한 ´미국의 50대 유망 직종´에서 테크니컬 라이터는 13위를 차지했다. 의학연구자(15위), 일반 엔지니어(17위), 의료서비스 매니저(28위) 등을 제친 순위다.
◇ 어떤 실무 하며 현직은 얼마나 있나 = 테크니컬 라이터는 출시 제품의 국내 매뉴얼을 쓴다. 설명서의 기본 뼈대(목차)를 잡고 본문을 쓴 뒤 최종 감수까지 도맡는 것이 보통이다.
영어로 번역을 한 해외용 매뉴얼을 읽어보고 개선점을 지적해주는 일도 테크니컬 라이터의 몫이다.
개발자들이 쓴 초벌 매뉴얼을 소비자의 눈높이에 맞게 쉽게 고치는 리라이팅(rewriting)도 한다.
국내에서 테크니컬 라이터가 되려면 대기업의 사내 라이터로 근무하거나 전문 매뉴얼 제작 업체에서 일하는 등 두 가지 길이 있다.
업계 관계자들은 삼성전자와 LG전자 등 대기업은 사업부 별로 각각 3∼10명의 테크니컬 라이터를 거느린 것으로 보고 있다. 매뉴얼 제작 업체는 전국에 아직 10개가 채 못된다.
5월초 출범하는 KTCA(한국테크니컬커뮤니케이션즈협회)의 장석진 사무국장은 "현재 협회 회원이 950여 명이지만 테크니컬 라이팅에 관심이 있는 엔지니어나 프리랜서 등도 다수 포함돼 있어 현직 라이터 수는 이제 확인을 해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이공계에 언어 논리력 있다면" = 대기업은 테크니컬 라이터를 따로 뽑지 않는다. 공채 일반직으로 입사해 해당 직종으로 옮겨갈 수 있지만 엔지니어 사원들이 전직을 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반면 매뉴얼 제작 업체는 별도 모집을 한다. 면접과 실무 평가 등을 보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업체에 따라 절차는 각기 다르다.
취업에는 이공계 전공이 좋다.
테크니컬 라이터는 제품 개발과 함께 집필을 시작해 개발 도중 엔지니어들이 넘겨주는 각종 문서를 보면서 매뉴얼 초안을 써야 한다. 때문에 기술적 지식을 일정 수준은 갖춰야 해 이공계 전공이 유리하다.
독서 등을 통해 언어 논리력도 쌓아야 한다. 매뉴얼 글의 구성을 조리 있게 잡는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글쓰기 능력은 선천적인 문재(文才)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쉽고 간결하게 쓰는 것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글쓰기에 거부감이 없다면 훈련을 통해 얼마든지 적응할 수 있다는 것이 업계의 귀띔이다.
◇ 향후 전망은 = 2002년 7월부터 국내에 제조물책임법(PL법ㆍProduct Liability)이 시행되면서 테크니컬 라이터의 비중이 더 커지는 추세다.
PL법은 사용자가 제품 때문에 신체 및 재산 상의 손해를 입으면 제조업체는 고의 여부와 상관없이 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내용.
때문에 기업들은 이런 문제로 소송이 걸리면 해당 제품 매뉴얼에 피해 사안을 충분히 경고했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
즉 휴대전화 배터리를 불 속에 던져 폭발로 화상을 입은 소비자가 있다면 해당 기업은 제품 매뉴얼에 ´위험: 배터리를 불 속에 넣으면 폭발함´ 등의 문구를 미리 넣은 것을 보여야 한다.
매뉴얼을 꼭 PL법 내용을 잘 아는 전문 라이터에게 맡겨야 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업계에서는 테크니컬 라이터들의 수요가 꾸준한 증가세를 보일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물론 테크니컬 라이터들에게도 고민거리는 있다. 아직 전문직으로 제대로 대우를 못 받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
대기업의 경우 테크니컬 라이터는 일반직 처우로 별도의 직무 수당이나 특별 인센티브를 받지는 않는다. 매뉴얼 제작 업체는 다들 중소기업 규모라 급여와 복지 등이 풍족하지 않다.
KTCA의 장 사무국장은 "앞으로 없어질 직종도 아니고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고소득 전문직으로 꼽혀 전망은 충분히 밝은 셈"이라며 "협회 차원에서 테크니컬 라이터의 위상을 높이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출처 : 연합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