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적이지 않으면 차별 영역간 재차별 우려
다른 영역의 차별과의 차이점을 인정해야
우리나라의 어느 교수가 뉴욕의 한 거리에서 이상한 장면을 보았다. 대중 버스가 한 대 서 있고 그 뒤로 사람들 십여명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더란다. 그런데 버스 안을 보니 텅텅 비어있었기에 호기심이 동한 이 양반이 무슨 일인가 가까이 가서 살펴보았다. 그랬더니 그 버스엔 한 휠체어 장애인을 태우기 위해 버스 기사는 리프트를 작동 중이었고 시민들은 이 장애인이 탑승할 때까지 누구 하나 불만없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위 말은 장추련 공청회에서 어느 발제자가 장차법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한 말이다. 즉, 이러한 장면을 미국 시민들의 선진적 의식성으로 이해했으나 알고 보니 그렇게 변하게 된 까닭은 바로 미국의 ADA의 영향이었다는 것이다. 똑같은 장면이 우리나라 서울이나 부산 같은 대도시에서 벌어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몇 십 명이 줄을 서서 기다리지도 않을 것이며, 그렇지 않아도 성질 급한 우리나라 사람들 다들 한 마디는 했을 것이고 결국 장애인은 일반인들이 다 탑승한 다음에야 그것도 시간을 겨우 할애 받아서 가장 끝에 탑승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비행기를 타게 되면 가장 먼저 기내로 들어가서는 제일 늦게 나오게 되는 까닭도 이러하다.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나 자신도 알게 모르게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고 우리사회는 노골적으로 강제하기도 한다. 결국 장애인은 일반이 살아가는 데에 걸리적거리는 존재일 뿐이며 최대한 그들이 피해를 받지 않는 선에서 배려를 받으며 감사하게 생각하며 살아야한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장애 이데올로기이다.
무릇 법이란 사회구성원들간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최후의 보루로 우리 사회가 선택하는 것이고 그것으로 강제하는 것이다. 가장 좋은 법은 그 법이 발동되지 않고도 사회구성원들 간의 합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장애인차별금지법, 그것도 독립적인 장차법을 주장하는 주된 이유는 장애인을 차별하는 사람을 벌하자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 차별에 대한 섬세한 감수성을 바탕으로 법안이 가지는 파급력으로 성숙한 시민의식을 만들어 보자는 교육적 효과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제자에게 매를 드는 스승의 진정한 뜻은 아픔을 경험해 보라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그러한 짓을 하지 않게 교훈을 주는 것이다. 이렇듯 장차법도 장애인 차별에 대한 감수성이 일반화되어지고 일상화되는 데에 우리사회에서 스승의 매 역할을 기대하는 것이며,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이런 지긋지긋한 장애 이데올로기를 철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위의 미국의 예와 같이 이렇게 섬세한 장애인 차별에 관한 이야기를 과연 사회적 차별금지법이 얼마나 기여할 것인가? 과연 얼마나 장애인 차별에 대한 ‘스승의 매’ 역할을 할 것인가? 한 마디로 'NO'이다.
지난 9일에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사회적차별금지법 공청회가 있었다 한다. 초안으로 나온 국가인권위원회의 사회적 차별금지법을 살펴보면 장애를 포함해서 여성, 학력 등 총 21개의 사유에서 고용, 재화․용역 등의 공급이나 이용, 교육기관, 공권력의 행사 및 행정작용 등 4개 영역에서의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직접 차별은 물론이려니와 간접차별과 괴롭힘(harassment)도 차별의 대상에 포함시키고 있다. 또한 장추련에서 강하게 주장해온 권리 구제에 있어서도 입증책임의 전환, 시정명령권 도입, 징벌적 손해배상 등의 실효성있는 권리 구제 수단도 갖추어졌다. 그렇다면 이것으로 해결이 다 된 것인가? 이 법으로 과연 뿌리깊이 박힌 장애 이데올로기를 철폐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독립적 장차법과 독립적 차별시정위원회를 주장하는 바는 대략 다음과 같은 점을 우려하고 우리의 ‘다름’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첫째, 차별금지영역간의 재차별 가능성이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 6월 법 개정을 통해서 여성, 학벌, 비정규직, 외국인 노동자 등에 대한 모든 차별행위에 대한 업무를 국가인권위원회로 이관하였고, 그래서 자연히 장애 차별도 국가인권위원회산하의 차별시정위원회에서 다룰 것을 대통령이 지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장애인 차별은 다소 포괄적인 영역에 차별이 미치는 여성을 제외하고는 다른 차별영역이 거의 모두 고용 등의 문제에 국한된 것과는 달리 광범위한 영역에서 차별행위가 존재하고 있음 등에 비추어 수행 목적을 분명히 하지 못하고 방황할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그러다 보면 자연히 가시적인 성과가 드러나는 차별영역에 활동이 집중되어 차별영역 중에서 다시 차별을 받게 되는 이중차별의 서러움을 안아야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따라서 이론적으로는 평등권보장을 위한 차별행위 철폐를 위원회의 조사대상으로 하고 있는 국가인권위원회 산하에 차별시정위원회를 두는 것이 외견상 타당해 보이나, 실제로 위와 같은 형태로 설치되는 차별시정위원회가 인권위원회와 같이 무기력해 지거나, 다른 차별영역의 가시적인 차별시정업적에 밀려날 가능성도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장애계는 독립적 장차법 논의를 또다시 시작하게 될 지도 모른다.
둘째, 차별기간의 영구성 문제이다. 장애인은 우선 다른 차별 영역과 비교했을 때 차별기준에 비추어 그 차별의 기간이 영구적이라는 점에서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이 있다. 학벌이나, 비정규직, 심지어는 외국인까지도 이를 보완하기 위한 보직변경, 자격취득 등으로 인하여 그 지위의 변동이 생길 가능성이 있으나 장애인은 한 번 장애를 입게 되면 그 장애기간이 영구적이어서 다른 차별과는 뚜렷한 차이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여성의 경우도 비슷하여 이러한 필요성 때문에 여성차별에 대해서는 남녀차별을 금지하는 법률을 독자적으로 제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성계는 차별시정위원회의 일원화에 동의를 하고 있다. 현재 주된 여성 차별의 내용 또한 고용과 가정 폭력 등에 있다는 점에서 그 영구성의 내용이 장애인과는 다르다는 것에 기인한 듯 하다.
셋째, 차별유형의 총체성이다. 장애인의 경우에는 고용뿐만 아니라 교육, 주거, 이동권, 정치참여, 정보에 대한 접근성 등 삶의 전반적인 영역에서 총체적으로 차별을 받고 살아가고 있다. 따라서 장애인에 대한 차별의 문제는 다른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는 많은 차이가 발생한다. 장애인 차별 문제는 인생의 한 주기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생애에 걸친 문제이며, 버스 앞에서, 식당 안에서, 화장실에서도 일어나는 일상적이고도 종합적인 총체적 문제이다. 그리고 뭉뚱그려서 장애 문제라고 하지만 장애 유형과 중증의 정도 등에 따라서 그들이 겪는 차별의 내용과 감수성은 천지 차이로 다양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장애 및 차별판단 기준의 다양성의 문제를 들 수 있다. 장애인 차별은 그 장애의 판단기준이 지극히 다양하다는 점에서 다른 차별 영역과 차이가 있다. 학벌, 여성, 비정규직, 외국인의 구별기준이 명확함에 비추어 장애인에 대해서는 장애의 판정기준에서부터 다양성과 전문성이 동시에 고려되지 않으면 도저히 이를 정의하기 조차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장애판단기준의 다양성은 단순한 구별을 전제로 다른 차별과 일률적으로 처리하는 것을 어렵게 하고, 그에 따른 차별시정 또한 각기 다양한 형태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따라서 위에서 언급한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만일 장애인차별의 문제를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아닌 일반적인 의미의 차별금지법 제정으로 풀어가고자 한다면 적어도 장애인 차별에 관한 한 별 실효성이 없을 것 같다. 장애인차별금지법을 별도로 제정하지 않고, 포괄적이고 일반적인 차별금지기본법만을 제정하여 장애인차별 문제를 다른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과 마찬가지로 다루고자 한다면 장애인은 그 속에서 새로운 차별을 경험할 것이고, 이는 결국 장애인으로 하여금 상당기간 사회구성원으로서의 기본적 권리를 포기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특히 이번 국가인권위원회 공청회에서 권리구제에 관한 내용은 상당한 진전이 있었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문제는 권리구제 수단은 확실한 것 같은데, 정작 장애 차별이 무엇인가라는 부분은 여전히 상식적인 차별에 대한 감수성에 머물러 있다. 장추련이 제안한 장차법은 바로 이 장애 차별에 대해서 고용·교육 등 총 14절에 이르는 방대한 장애 차별에 관한 내용을 정리해 두고 있으며(이것도 줄이고 줄이고 엑기스만 모은 것이다), 특히 여성차별과 장애아동 부분은 따로 정리해 놓았다. 이렇게 장애 차별의 내용이 없이 권리구제 수단만 강조한 것은 싸움에서 무기는 많은데 정작 그 대상이 없어서 무기가 녹이 쓰는 실로 황당한 상황으로의 비유가 가능한 것이고, 제자에게 때리는 스승의 매가 솜방망이이거나 아니면 잘못 걸려서 뭇매를 맞는 불쌍한 제자들만 양산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필자는 일반법으로서의 사회적차별금지법의 제정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순위에 있어서 필요한 장애인을 위한 독자적인 차별금지법이 우선적으로 조속하게 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독자적인 장애인차별금지법의 제정은 사회적 차별금지법의 제정 여부와 상관없이 필요한 것이다. 그 핵심이 바로 장애 차별의 분명한 내용 담보와 독립적 차별시정위원회의 설치이다.
이제는 우리 사회가 독자적인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 목소리에 대하여 또 하나의 집단이기주의라는 시각으로 바라 볼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사회 공동체 속에서 가장 피부로 와 닿는 차별의 피해자들인 장애인의 목소리를 듣고 장애인 당사자의 차별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성숙함을 보여야 할 때라고 생각된다.
*에이블뉴스는 '왜 독립적인 장애인차별금지법인가'를 주제로 특별기고를 받고 있습니다. 장애인계가 주장하는 독립적인 장애인차별금지법과 장애인차별금지위원회가 왜 독립적이어야하는지 주장을 펼쳐주시기 바랍니다. 이번 글은 장애인차별금지법제정추진연대 변경택 공동대표께서 보내오신 글입니다.
기고/변경택 (osssp2@hanmail.net)
출처:에이블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