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사자주의 주장이 이기적으로 보이는 이유
주체 설정, 장애인범주 안에서 고민 말아야
결론부터 말을 하자면 장애인당사자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극단적으로 표현한다면 극히 이기적인 단어라고 본다. 운동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장애인과 장애인당사자, 그리고 장애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활동가들이 모두가 하나라고 볼 수 있는데 애써 그것을 당사자와 비 당사자로 구분을 지을 필요가 있는가하는 것이다.
장애가 있든 없든 장애인에 대한 모든 차별을 철폐하라는 것이 하나의 대명제이다. 그 명제아래 풀어가는 방식에서 상호간 의견충돌이 있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발전을 위한 과정일 뿐이지 권력을 가지기 위한 욕심이 아니다. 그럼에도 각 단체들이 장애인당사자주의를 앞세워 기득권을 지키려하는 것은 결국 이권을 지켜내려 한다는 불신을 만들어 가는 것이라 본다.
지금까지 사회적으로 차별을 받으며 살아온 당사자 입장에서는 다시 과거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수 있겠지만 그런 주장이 다양한 형태의 장애인운동의 걸림돌이 된다면 직접적인 피해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도 장기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이는 커다란 폐해가 될 것으로 본다.
운동성이란 것은 과거를 딛고 현재를 바로 세워 미래를 만들어 가는 것이라 본다. 그런데 당사자주의라는 편협한 시각에서 모든 문제를 바라보려 한다면 결코 미래를 만들어 가지 못할 것이다.
기득권이나 이권이란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지금까지 누려온 각 단체로 줄을 잇는 모든 지원과 사업, 그리고 발전방향과 연결이 된다.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지 하는 고민이 선행돼야 함에도 사업을 위해 권력을 위해 존재하는 고민만 이루어진다면 운동의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당장 ‘장애인차별금지법’만 보더라도 모든 장애인들의 하나된 염원이라 할 수 있음에도 각 단체들이 적극적인 참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각자의 길을 가고 있다. 법을 제정하기 위해 싸우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보면 활동가들이 많이 있다.
물론 장애인 당사자가 활동가로 참여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있지만 비장애인들이 적극적인 참여로 운동의 폭을 넓혀가고 있음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정신지체를 가진 아이들을 둔 부모들의 참여는 눈물겹기까지 하다. 시간에 쫓겨 가며 모든 집회에 참여하고, 농성에 참여하고 있는 그들을 장애당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배제할 수 있을까?
장애인의 정치적발언권을 세우고 정치참여를 통한 변화를 모색한다는 것도 하나의 방향이다. 하지만 그런 발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왜 장애인차별금지법에는 고개를 돌리는가. 법제정에 관련해서는 그 어떤 단체에서도 ‘옳다, 그르다’라는 의견을 내지 않고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 해석을 해야 하는가.
장애인당사자주의를 주장하며 운동의 질적, 양적 역량을 구분 지으려 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정신지체의 경우 자신의 의견을 올바로 전달 할 수 없으며 그로인해 그 부모들이 나서서 차별해소를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당사자주의로 봐야 하는지, 아니면 장애운동의 활동가로 봐야 하는지, 또한 활동가들의 활동이 장애인당사자주의에 어긋나는 것인지 아니면 그 범주에 포함이 되는 것인지 말이다.
운동이라는 측면을 강조한다면 장애가 '있다, 없다'의 이분법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의 인권과 권리가 침해당하는 현실에 분노할 줄 알고 그것을 개선하기 위한 공동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생산적 방식이라 본다.
장애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각자의 가치에 의해 판단하고 결정하고, 바꿔야 할 것이 있으면 함께 바꿔 나가는 방법들을 만들어 가는 토론이 필요하지 당사자와 비당사자의 것으로 구분을 지을 필요가 없다고 본다.
적어도 이 부분에서 운동을 하고 있다면, 혹은 하려한다면 소모적인 논쟁이 불필요하다고 본다.
장애인당사자로서 삶의 주체로 서는 것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결정하고 실천하는 자세를 가진다는 것은 좋다. 그러나 그것을 굳이 당사자의 몫이라 규정지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운동의 당위성만 가지고도 충분하게 그것을 이루어 갈 수 있음에도 당사자의 몫을 규정하려하는 것은 운동역량을 깎아 내리는 결과만 초래 할 뿐이라는 생각이다. 당사자든 아니든 가치와 이념이 맞는다면 누구와도 어떤 형식이든 손을 잡을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할 뿐이다.
역사적으로 장애인의 목소리가 제대로 나온 적이 없고 기존의 단체들은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지 못했다는 철저한 자기반성을 토대로 새로운 장애운동의 활로를 만들어 가야 할 때라고 본다.
장애인 문제는 당사자 뿐 아니라 국가적 차원의 것과 사회적 차원의 것으로 나눌 수 있으며 복지향상이나 기타의 서비스(이동권과 교육권향상)질을 높여 나가는 차원과, 기본적 권리와 인권을 향상해 나간다는 뚜렷한 목적의식이 전제된 운동적 차원으로 접근해야 올바르다는 생각이다.
그것을 단순히 장애인, 혹은 당사자로 국한시켜 논의를 해 나간다는 것은 소모적인 토론이라 할 수 있겠다.
진정으로 장애인당사자, 그리고 그 부모들을 위한다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차별의 근거들을 제거하고 더 많은 목소리가 나오는, 더 많은 활동가들이 나오는 방향으로 접근하는 것이 올바른 토론의 방향이라 본다.
왜 당사자주의를 고집하려 하는가. 왜 장애인 문제를 장애인들에 국한시켜 풀어가려 하는가. 진정으로 장애인문제를 해소시켜 나가려 한다면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 다양성 안에서 다양한 방법들을 찾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주체로 서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를 설정함에 장애인의 범주 안에서 고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장애인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복지향상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수많은 비장애인들이 장애인운동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말로도 해석될 수 있는 당사자운동이란 범주의 틀을 깨야 할 것이다.
당사자주의를 고집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노동운동은 노동자의 몫이고, 농민운동은 농민들만의 것인가? 그럼 사회운동은, 민중운동은 누구의 몫이 되는가? 운동의 질적 변화라는 것은 각 단위의 주체들이 다른 단위의 주체들과 함께 할 수 있을 때 가능하며, 그렇게 될 때 사회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스스로 운동의 한계를 지으며 운동의 당위성을 이야기 할 수 없다고 본다. 장애의 틀을 벗어나 더 넓은 세상과 만날 때 모든 장애인들은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당사자주의를 주장하는 것을 극단적으로 이기적 표현이라 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각 단체를 운영하는 주체로서 꼭 장애가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편협한 사고라는 것이다. 장애가 없어도 장애관련단체를 운영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의 생각과 사고가 불이익을 받는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마음이 있고, 차별에 저항할 수 있으며, 가치관이나 이념이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그들의 권익을 지켜내기 위해 노력을 기울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다.
장애인 운동이 장애당사자가 주체가 되는 것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주체가 된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쥐고 가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운동은 여러 개체들이 모여 하나 된 모습을 만들어 가는 것이라 본다. 그렇게 될 때 운동의 역량이 커지게 되고 장애인과 관련한 불평등과 차별들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에이블뉴스는 12월 1일 창간 3주년을 맞아 장애인당사자주의에 대한 ‘장애인당사자주의를 말한다’를 주제로 특별기고를 받았습니다. 종이신문에는 지난 11월 30일자로 요약 내용을 보도했습니다. 인터넷 지면으로 기고받은 글을 차례차례 올리고 있는 도중, 정신지체 2급의 장애를 가진 아이의 부모라고 자신을 소개한 최석윤씨가 관련 원고를 보내오셨습니다. 아직 인터넷에 게재할 원고가 많이 남아있는 상황입니다만, 토론의 활성화차원에서 이 글을 먼저 게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앞으로도 기고를 원하시는 분은 에이블뉴스 편집국(전화 02-792-7785, 팩스 02-792-7786)으로 연락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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