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사회] “아이스하키 국가대표 상비군에 선발됐다고 얼마나 좋아했는데, 왼쪽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니…. 그때 심정을 짐작이나 하시겠습니까”
한국장애인고용촉진공단 경기지사 고용촉진팀 손용근 대기업팀장(36)은 15년 전의 사고를 떠올리는 것이 괴로운 듯 눈을 지긋이 감았다.
그는 현재 장애인고용촉진공단에서 장애인들을 대기업에 취업시키는 일을 맡고 있다. 그렇지만 20대 초반까지만 해도 미국프로아이스하키리그(NHL) 진출을 꿈꾸던 전도유망한 선수였다. 아이스하키 명문 서울 보성고를 졸업한 후 1991년 체육특기생으로 경희대에 진학한 손씨는 얼마후 국가대표상비군에 선발됐다. 그때만해도 부러울 것이 없었다.
그러나 92년 7월 어느 날, 그의 운명을 바꾼 사고가 발생했다. 서울 목동 아이스링크에서 동료들과 4개조로 나눠 연습 게임을 하던 중 왼쪽 발등이 상대 선수의 스케이트 날에 찍혔다. 유난히 자신과 격렬한 몸싸움을 벌이던 동기생이 일으킨 사고였다. 인근 이대 목동병원에서 응급처치를 받고 집이 있는 강동구의 한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했다. 그렇지만 차도가 없었고 오히려 20여일이 지나면서 발에서 썩는 냄새가 났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상처가 파상풍으로 악화된 것이다.
“정말 이해되지 않았어요. 치료를 받는데 낳기는커녕 발이 썩어간다는게 말이 됩니까. 당시의 절망감이란….”
해병대 중령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검진 사진을 들고 경찰병원, 서울대 병원, 영동세브란스 등을 다녔으나 결과는 같았다. ‘절단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태롭다’. 젊은 인생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수술 당일, 왼쪽 허벅지 아래를 절단하는 11시간의 대수술 후 어머니는 아들의 잘린 다리를 껴안고 피눈물을 쏟아냈다. 그를 가장 괴롭힌 것은 다리가 절단된 후에도 마치 그 부위가 존재하는 것처럼 느끼는 ‘환상지(幻像肢)’였다. 아프기도 하고, 때로는 가려운듯해 수십번 헛손질을 했다.
8개월여 만에 퇴원한 다음 그는 1년여 끈질기게 재활 훈련을 받았다. 어느 정도 보행이 가능해지자 세상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다리가 잘린 아이스하키 선수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생각에 대학을 자퇴하고 자격증을 따기 위해 학원을 다녔다. 건축산업기사, 건축제도기능사 자격증을 땄고 설계사무소와 인테리어 업체에 취직했다. 그렇지만 현실은 냉랭했다. 항상 장애가 걸림돌이었다. 4년간 7곳의 직장을 전전했다.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다시 대학 진학을 결심했습니다. 8개월 정도 낮에는 집 근처 경원대학 도서관, 밤에는 독서실을 오가며 목숨 걸고 공부했습니다.”
4곳의 대학에 합격한 그는 자신의 처지를 감안, 강남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했다. 이곳에서 아내를 만났다. 아내 역시 사회 경험을 하고 늦은 나이에 사회복지에 뜻을 두고 대학에 입학한 경우였다. 두사람은 서로를 애틋하게 아꼈다. 그러나 장애를 가진 사위를 선뜻 받아들일 딸 부모가 있을 리 없었다. 비를 맞으며 아내 집 앞에서 수 시간을 기다리기도 했고, 호출기를 빼앗긴 것도 몇 차례였다고 한다. 숱한 어려움을 겪고 재학 중이던 2000년 결혼한 아내는 지금까지 큰 바위처럼 그를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다.
대학 졸업 후 2002년 2월, 장애인고용촉진공단에 취업을 했다. ‘진주는 진흙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일까’. 그는 물 만난 고기처럼 일에 빠져들었고, 그 성과는 탁월했다. 장애인 고용 대신 고용 회피에 따른 부담금 납부를 택했던 대기업들이 그의 설득에 장애인에게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 바탕에는 물론 2005년 6월 체결된 대기업의 장애인 고용협약증진 프로그램이 있다. 그러나 손 팀장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장애인의 대기업 취업률은 미미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가 직·간접적으로 대기업 취업에 성사시킨 장애인은 450명 안팎. 삼성전자 삼성전기 아시아나 대한항공 한화 포스코 등 하나 같이 국내 굴지의 대기업이다.
물론 대기업들이 그에게 선뜻 문을 연 것은 아니었다. 사전에 약속을 하고도 접견실에서 2∼3시간 기다리는 경우는 부지기수며, 만남 자체를 피하는 사례도 허다했다. “안만나주면 오기가 생겨 더 집요하게 문들 두드렸다”는 손 팀장은 “아마 ‘안되면 되게 하라’는 아버지의 해병대 정신을 물려받은 것 같다”며 씨익 웃었다.
그의 승용차 주행거리는 현재 28만5000여㎞다. 그가 동생에게 3년 전 이 차를 얻었을 때 9만8000여㎞였으니 1년에 6만여㎞씩 다닌 셈이다. 비장애 직장인들은 1년 평균 2만㎞ 안팎을 운행한다고 보면 그가 얼마나 부지런히 발품을 팔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하루 평균 150㎞ 정도를 이동한다. 그의 이같은 노력에 고용촉진공단 이사장도 감동했다. 박은수 이사장은 지난 설에 직원들에게 보내는 인사 편지에서 손씨의 사례를 들며 ‘작은 영웅’이라고 극찬했다.
손씨는 대기업 취업을 희망하는 장애인들에게 ‘맞춤형 준비’를 할 것을 권유했다. 자신의 학력, 적성, 희망 등을 고려해 미리 가장 적합한 직종을 선택한 다음 차근차근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학생은 학점 관리 및 어학 능력 배양은 기본이며 해당 기업 사이트에서 채용 정보를 입수하라고 조언했다.
그는 취업에 대한 장애인의 잘못된 인식을 따끔하게 꼬집었다. “장애인에 대한 문호가 대폭 개방되면서 준비 없이 꿈만 키우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 같다”면서 “노력은 하지 않고 혜택을 기대하면서 눈만 높아진 주위 사람들을 보면 안타깝다”고 지적했다. 해당 기업에서 요구하는 자격을 갖춰놓고 취업에 도전해야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궁극적으로는 기업과 장애인이 상생할 수 있는 고용 관계가 갖춰져야 한다고 믿는다. 장애인 고용을 시혜적 차원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 입장에서 유리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첫 월급을 탔다면서 음료수를 사오거나, 장애인을 받아들인 기업에서 추가 채용을 의뢰할 때 가장 보람을 느낀다는 손 팀장은 “일할 수 있는 장애인 모두가 일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꿈”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출처 : 국민일보 쿠키뉴스 정진영편집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