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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임은경의 "가슴에 묻어둔 이야기"2006-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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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전 주눅들어 있었어요. 아니 세상이 무서웠다는 게 더 정확할 거예요. 어른들이 ‘벙어리 딸’하고 놀지 말라고, (친구들을) 제게서 떼어놨었죠. 그때 누구도 나에게 말해 준 사람이 없었어요. 장애는 부끄러운 게 아니라고. 똑같은 사람일 뿐이라고.”

인터뷰 내내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던 여배우가 치맛단을 조용히 말아 쥔다. 아직 소녀 티를 채 벗지 못한 임은경이다. 왼손에 들고 있는 책은 ‘붕어빵의 꿈’(현문미디어 刊). 청각 장애를 가진 부모 밑에서 자란 고통스러운 어린 시절과 연예인으로 사랑 받게 된 행운을 동화 형식으로 담아냈다. 임은경의 이야기를 듣고 동화를 쓴 사람은 소설가 고정욱씨. 그도 어린 시절 소아마비를 앓아 휠체어에 의존하는 1급 지체 장애인이다.

임은경의 부모가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알려졌지만,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부모 밑에서 외동딸인 그녀가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는지, 그 불행이 어떻게 찾아왔는지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1999년 고1 때 TTL(휴대폰) 광고모델로 데뷔한 뒤 스타덤에 올랐지만, 내성적인 사춘기 소녀는 자신의 가족에 대해 극도로 말을 아꼈다.

“책까지 내고, 이제는 마음이 좀 편해졌느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다시 치맛단을 말아 쥐었다. “좋게 봐주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분명히… 부모 팔아서 책 팔아먹으려는 속셈 아니냐고 하시는 분도 일부 있을 거예요. 솔직히 신경 쓰여요.”

그런데도 결심을 하게 된 이유에 대해 ‘부모님들 대신…’이라는 표현을 썼다. “어린 친구들이 제 얘기를 동화로 읽고 장애에 대한 편견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다면, 잘 한 일이 아니겠느냐”는 위안이다. “아직도 장애인들과 같이 놀지도 못하게 하는 부모님들이 많지 않으냐”는 그녀의 말에, 대꾸할 말을 찾기 힘들었다. 임은경이 어린 시절 입은 상처는 작지 않아 보였다.

그녀의 부모는 두 사람 모두 2급 판정을 받은 청각장애인. 아버지는 태어날 때부터, 어머니는 어린 시절 고열에 시달린 뒤 청력을 잃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이제 상대방의 입 모양을 보고 몇 마디는 알아들을 정도로 좋아졌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상태. 어린 시절 임은경이 “엄마는 언제부터 그렇게 됐냐”고 물었을 때, 외할머니는 “감기 앓을 때 마이신을 너무 많이 먹였더니 고막이 녹아 눌어붙었다”고 들려줬다. 소녀는 절간 같은 집에서 표정을 잃고 살았다. 그나마 함께 살았던 할아버지 할머니가 없었다면 소녀는 말도 제때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가장 힘들었던 순간에 대해 그녀는 고1 때 세상을 떠난 삼촌 이야기를 꺼냈다. 유전 탓인지, 삼촌도 청각 장애인이었고, 아버지와 함께 목수로 일했다. 둔촌동 집 주변 건축 현장에서 일하던 두 사람은 “무너진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고, 수십 톤 쇠파이프 더미에 깔려버렸다. 다행히 아버지는 목숨을 건졌지만, 삼촌은 목숨을 잃었다. “우리 은경이는 얼굴이 예쁘니까 나중에 꼭 탤런트 될 거야”라고 수화(手話)로 격려해 주던 삼촌이었다. ‘벙어리 딸’이라는 주변의 놀림이나, 반지하방에서 몇 푼의 돈을 벌기 위해 샹들리에에 들어갈 작은 전구를 하루 종일 끼우는 일을 해야 했던 어린 시절의 가난은, 그 슬픔에 비하면 터무니 없이 작은 것이었다.

‘신비 소녀’로 사랑받으며 모든 이의 관심이 집중되던 몇 년 전에 비해, 사실 현재의 임은경은 인기의 정점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다. 하지만 덕분에 밤이면 부모가 좋아하는 치킨과 족발을 간식으로 시켜먹을 수 있는 소박한 여유가 생겼다. 아버지 어머니와의 대화 수단은 휴대폰 문자메시지. “부모님은 휴대폰을 문자메시지 주고받기에만 사용하는데도 기본요금은 똑같이 받아요. 너무하지 않아요?”라고 투덜대는 그녀가, 사랑스러웠다.

출처:조선일보